1998년 포철공고를 졸업하고 녹색 그라운드에 뛰어든 그를 사람들은 ‘라이언 킹’이라 불렀다. 검게 탄 얼굴에 탄탄한 체격, 득점 기회를 놓치지 않는 골 결정력. 스탠드는 그를 보려는 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에도 승선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팬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22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2009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 이동국(30·전북 현대)의 축구 인생은 굴곡이 많았다.
○ 영웅의 등장
11년 전 이맘때 이동국은 평생 한 번뿐인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프로 데뷔 첫해 11골을 터뜨렸다. 185cm의 큰 키에 양발과 머리로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능력에 축구 팬은 열광했다. 특히 수비를 등진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차는 터닝슛은 상대 골키퍼가 손을 못 댈 정도로 파괴력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축구 실력에 잘생긴 외모까지 갖춘 그는 ‘앙팡 테리블’ 고종수(은퇴)와 함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다.
○ 악몽 또 악몽
하지만 갑작스러운 인기는 독이 됐다. 이동국은 프로 첫해 이후 하향곡선을 그렸다. 특급 골잡이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득점력은 계속 떨어졌다. 1999년 8골, 2000년 4골, 2001년 3골. 그에 대해 ‘게으르다’는 등 부정적인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거스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열심히 뛰지 않는 선수는 필요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다. 결국 TV로 4강 신화를 지켜봤다. 4강 멤버들이 군 면제 혜택을 받았을 때 2003년 광주 상무에 입대해 절치부심 부활을 꿈꿨다. 2005년 포항으로 돌아와 7골을 터뜨리며 가능성을 보였다. 이듬해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특유의 골 감각을 되찾으며 그라운드를 휘저었다. 그러나 딕 아드보카트 대표팀 감독이 이동국을 선택하려는 순간 부상이 앞길을 막았다. 2006년 4월 경기 중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져 병원 신세를 졌다. 다시 TV로 월드컵을 지켜봐야 했다.
○ ‘올드 보이’의 귀환
부상을 털고 일어난 이동국은 2007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에 진출하며 새로운 축구 인생을 기약했다. 하지만 적응에 실패한 채 1년 만에 성남 일화로 돌아왔다. 지난해 2골만 터뜨리는 부진. 그리고 쫓겨나다시피 올해 초 전북으로 옮겼다.
그에게 전북 최강희 감독은 은인이었다. 최 감독은 이동국의 축구 인생을 되살렸다. ‘재활 공장장’이라 불리는 최 감독은 이동국의 문제점을 찾아 보완했다. 빅 리그 진출 실패에 이은 부진으로 자신감을 잃은 이동국을 칭찬하며 흥을 살렸다. 각종 언론과 인터뷰에서 “동국이가 게으르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 늘 열심히 뛰고 있다. 팀의 중심이다”라고 강조했다. 감독의 신임을 받은 이동국은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외국인 선수와도 대화를 많이 하며 친구처럼 지냈다. 그리고 골 사냥을 시작했다. 올해 정규리그 20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포스트시즌까지 22골을 터뜨려 전북을 창단 15년 만에 처음으로 K리그 정상에 올려놓았다.
이동국은 이날 기자단 투표 110표 중 108표를 얻어 MVP에 선정됐다. 득점왕과 베스트 11, 판타스틱 플레이어상(팬이 뽑은 최고 선수상), MVP 등 4관왕에 오른 이동국은 “오늘같이 행복한 날이 또 올까 싶다. 한때 팬들로부터 원성을 받는 선수였는데 팬이 주는 상까지 받아 기쁘다. 내년엔 꼭 월드컵에 출전해 한국 축구의 위상을 높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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