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등만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 동아닷컴
  • 입력 2010년 2월 19일 03시 00분


“영웅이여 다시 일어나요”
이규혁이 18일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 레이스를 마친 뒤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올림픽 레이스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올림픽 불운 징크스’에 발목이 잡혀 9위(1분9초92)에 머물렀다. SBS 화면 캡처
“영웅이여 다시 일어나요”
이규혁이 18일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 레이스를 마친 뒤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그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올림픽 레이스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하지만 ‘올림픽 불운 징크스’에 발목이 잡혀 9위(1분9초92)에 머물렀다. SBS 화면 캡처

■ 이규혁 ‘마지막 올림픽’
이 악물고 혼신의 질주… 1000m 달린후 드러누워
노메달로 끝난 4전5기… 그래도 그는 영원한 맏형
어머니 “다 잊고 푹 쉬렴”


18일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오벌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 17조 주자로 레이스를 마친 이규혁(32·서울시청)은 링크 안쪽 대기지역에 벌렁 드러누웠다. 거친 숨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듯 가슴은 오랫동안 오르락내리락했다.

이규혁에게 밴쿠버 올림픽은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이다. 1994년 릴레함메르 대회부터 5회 연속 올림픽에 나선 그는 올림픽 메달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이번만큼은 기필코 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각오였지만 기대를 모은 500m에서 15위에 그쳤다. 1000m에서는 이를 꽉 문 채 스타트하는 모습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는 600m를 41초73의 1위 기록으로 통과하며 기대를 모았지만 막판 스퍼트에서 힘이 빠졌다. 결국 최종 순위는 9위. 그는 남은 종목에는 출전하지 않는다.

차마 빙판에서 발을 뗄 수 없어서였을까. 이규혁은 한참을 누워 있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난 뒤 은메달을 따낸 후배 모태범(21·한국체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 한국 빙속 이끈 맏형

모태범은 500m 금메달에 이어 1000m 은메달까지 목에 걸며 단숨에 세계적 빙상 스타로 떠올랐다. 이규혁이 그토록 원했던 올림픽 메달을 모태범은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연거푸 거머쥔 것이다. 그런 모태범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규혁이다. 모태범은 “규혁이 형은 나의 우상이다. 나한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줬고 내가 쓰는 주법도 형한테서 배운 것”이라고 말했다.

이규혁을 우상으로 꼽는 후배는 모태범뿐만 아니다. 여자 500m 우승자인 이상화(21)도, 남자 5000m 은메달리스트인 이승훈(22·이상 한국체대)도 메달을 딴 뒤 하나같이 이규혁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김관규 대표팀 감독은 “이규혁이 있는 대표팀과 없는 대표팀은 차원이 다르다”고 말했다.

○ 그대는 진정한 영웅


20년 동안 태극마크를 단 이규혁의 노하우는 스케이팅 기술부터 정신 자세까지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모태범, 이상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국 빙상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이규혁이지만 올림픽을 끝내는 진한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밴쿠버로 가기 전 “이번 올림픽은 4년 내내 준비했다”고 말했던 그였다.

그는 이번 올림픽도 이전과 다름없이 노 메달로 마쳤다. 다른 게 있다면 많은 국민이 그의 도전에 예전보다 훨씬 많은 박수를 보냈다는 것. 서울 성북구 보문동의 이규혁 집에서 손자의 경기를 지켜본 할머니 원순남 씨는 “금메달은 하늘이 만들어주는 거라는데 운이 안 따랐다. 의지가 강한 애니까 앞으로도 알아서 잘할 것”이라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누구보다 가슴을 졸인 어머니 이인숙 씨는 “아들이 지난일은 다 잊고 한국에 와서 푹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500m 경기 전 아들에게 받았다는 휴대전화 문자를 공개했다.

“엄마 나 준비됐어. 이번엔 정말 빈틈없이 준비했는데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까 떨리네. 하지만 엄마가 있으니까, 할머니가 계시니까, 동생 규현이도 있으니까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거야. 끝나고 통화해.”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 다시보기 = 이규혁의 마지막 질주



▲ 동영상 = 이규혁의 아름다운 4전 5기



B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