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 m 경기가 열린 리치먼드 올림픽오벌은 네덜란드의 상징색인 오렌지 유니폼을 입은 관중으로 가득했다. 5000m 금메달리스트 스벤 크라머르(네덜란드)가 결승선을 통과하자 기립박수를 보내며 2관왕 등극을 축하했다. 하지만 환호는 잠시였다. 이승훈(22·한국체대)보다 4.05초 앞선 12분54초50에 결승선을 통과한 뒤 전광판을 보며 환한 표정을 짓던 크라머르에게 헤라르트 켐커르스 코치가 다가가 무슨 말인가를 건넸다. 크라머르는 얼굴이 굳어지며 고글을 벗어 내팽개쳤다. 치밀어 오르는 분을 못 이긴 듯 빙판을 스케이트날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크라머르는 8바퀴를 남겨 둔 상황에서 아웃코스로 들어가려다 켐커르스 코치의 지시를 받고 황급히 인코스로 진입했다. 켐커르스 코치는 크라머르에게 이승훈과의 시간차를 알리려고 알림판에 숫자를 적느라 순간 코스를 착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크라머르는 인코스를 연속으로 타게 돼 실격 처리됐다. 2명이 함께 달리는 스피드스케이팅은 사고가 나는 것을 막고 형평성을 위해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인코스와 아웃코스를 번갈아 달려야 한다. 이날 크라머르는 코치의 실수 탓에 함께 레이스를 펼친 선수와 같은 레인을 지났다.
대표팀 김용수 코치는 “인코스를 두 번 돌게 되면 3초 정도 기록을 단축할 수 있다. 거리상으로는 30∼40m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크라머르가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승훈을 1초 정도 앞지르고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셈이다.
크라머르는 또 하나의 실격 상황을 연출했다. 코치의 지시로 안쪽으로 파고들다 코너 입구의 인코스와 아웃코스를 나누는 고깔에 오른쪽 다리를 걸치며 인코스로 들어갔다. 고깔 이후부터 선수의 몸이 다른 코스로 넘어가면 실격이다. 크라머르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코너를 돌기 직전 코치로부터 지시를 받고 코스를 바꿨다. 그런데 두세 바퀴를 남겨두고 스탠드에 있는 여자친구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는 걸 봤다.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고 밝혔다. 켐커르스 코치는 “모두 내 실수이고 책임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나쁜 일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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