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그룹의 핵심 주력사는 SK 텔레콤이다. 통신사인만큼 스피드에 사활을 건다. SK가 박태환이나 농구단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엄정욱은 그런 SK가 추구하는 이미지에 제대로 부합하는 가치주였다. 시속 158km.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사나이.
한때 이런 엄정욱을 금이야 옥이야 다루던 시절이 있었다. 2004년 105.1이닝을 던져 119삼진을 잡아낼 때(7승5패)만 해도 SK의 미래 에이스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데뷔 초기엔 제구력이 안 잡혔고 2004시즌을 치르다간 부상이 도졌다. 이후 2005년 14.2이닝, 2006년 1.2이닝만 던졌고 수술대에 오르길 반복했다. 2006년 말 어깨, 2007년 초 팔꿈치 수술을 미국에서 했다. 그 탓에 2007∼2008년은 단 1경기도 던지지 못했다.
그리고 2008년엔 3번째로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한국에서 받았다. 엄정욱은 돌아왔지만 예전의 스피드가 사라졌다. SK 김성근 감독은 2009년을 사실상 마지막 기회를 줬다. 그러나 6경기(7이닝) 등판이 전부, 결국 실패였다.
그렇게 끝나가는 줄 알았던 엄정욱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그 자신이었다. 곁에서 지켜본 진상봉 운영팀장은 “절치부심의 힘”이라고 했다. 데뷔 10년차인데 신인급 연봉(2900만원). 예전까진 주변에서 ‘오냐오냐’ 해주던 환경이었다면 김 감독 밑에선 스스로를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김 감독이 먼저 “올 시즌은 엄정욱”이라고 2010년 SK 최고 블루칩으로 꼽았다. 김광현 전병두 등이 빠진 채 시즌을 맞아야 되는 SK 처지에서 엄정욱의 구위 회복은 사활적 관건이었다. 엄정욱이 선발진에 들어와야 글로버∼카도쿠라∼송은범∼고효준과 더불어 선발진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던 예년은 잊으라는 듯 엄정욱은 대형 우완투수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시범경기 3차례 등판해 10이닝 무실점이다. 특히 18일 삼성전은 5이닝 무실점 8삼진을 잡아냈다. 직구 구속은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148km를 찍었다.
SK의 3-0 승리 직후 만난 엄정욱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큰 수확은 슬라이더 제구력이었는데 상당히 기분 좋다. 포크볼 제구만 잘 되면 올 시즌 정말 자신 있다”고 말했다. 3이닝을 던진 뒤 어깨가 뭉치는 느낌이 들어 5회까지 던지고 내려왔지만 사실상 선발 진입을 굳히는 역투였다. 빠져도 빠져도 솟아나는 SK의 화수분 야구, 2010년 버전은 엄정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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