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IOC 위원장에 처음 오른 1980년 초반 올림픽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IOC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첨예한 동서 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서방국가들의 보이콧 사태 때문에 반쪽 대회로 전락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동유럽 국가의 불참으로 얼룩졌다.
사마란치 전 위원장은 추락을 거듭한 올림픽을 되살린 주역이었다.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구분을 없애고 거액의 중계권 계약과 스폰서 유치로 IOC의 재정을 되살렸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올림픽이 흑자로 전환한 것도 그의 공로였다.
한국 위해 꾸준히 영향력 제 1회 서울평화상 받아
그가 IOC 위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올림픽은 명실상부한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로 발돋움했다. 스위스 로잔의 IOC 본부 인근에 올림픽 박물관을 개관했으며 스포츠중재재판소를 창설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IOC 선수위원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한국 스포츠의 국제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도 그의 역할은 지대했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과의 오랜 친분과 각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1982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동서 냉전의 그늘에서 벗어나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도 IOC 위원장 자격으로 총회에 직권상정까지 한 그의 도움이 컸다. 그 후에도 올림픽을 통한 남북 화해, 2002년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공동개최, 2002년 부산의 아시아경기대회 유치 등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1990년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해 제정한 서울평화상의 첫 수상자이기도 했다.
김운용 전 부위원장은 “5월 17일 함께 자주 가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하기로 약속까지 해 뒀다. 30년 동안 가족처럼 지내온 분인데 지금 심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1975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국가올림픽위원회연합회 총회에서 처음 사마란치 전 부위원장을 만나 30년 넘게 동반자로 지내온 김 전 부위원장은 “파산 상태였던 IOC 재정을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이런 업적이 IOC의 황금시대를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다. 사마란치 전 위원장은 지나친 상업주의를 도입해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고 독선적인 운영으로 IOC 마피아를 양성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파산 상태 IOC 재정 살려
“IOC 황금시대 개척” 평가
오랫동안 국제 스포츠의 권좌에 머물다 보니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1999년 ‘솔트레이크시티 스캔들’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미국 솔트레이크시티가 겨울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IOC 위원을 포함한 수뇌부에 뇌물을 뿌렸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IOC 위원 6명이 축출되고 4명이 사임했다. 이로써 사마란치 전 위원장의 도덕성이 큰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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