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선(44·블랙야크)의 여성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 여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려줄 것으로 기대됐던 엘리자베스 홀리 씨(86·미국)가 답변을 유보하면서 '오은선 논란'의 향후 전개 방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홀리 씨는 3일 오은선을 만나 에두르네 파사반(37·스페인)이 제기한 칸첸중가 미등정 의혹에 대해 물었다. 오은선은 자세히 설명했고 홀리 씨는 마지막으로 '14좌 완등을 했느냐'고 물었다. 오은선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축하한다'고 말했다. 일부 언론은 이를 두고 홀리 씨가 14좌 완등을 인정했다고 전했다. 여기에 홀리 씨가 환하게 웃었다는 점까지 덧붙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로선 홀리 씨가 오은선의 여성 최초 14좌 완등을 깔끔하게 인정했다고 보기 힘들다. 엄밀히 말해 홀리 씨의 말은 '14좌 완등을 했다면 축하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홀리 씨는 같은 날 본보와 인터뷰에서 "파사반이 의혹 제기를 철회하지 않는 한 논쟁 중(disputed)이라는 표시를 지울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자신은 기록자일 뿐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자신의 역할은 기록일 뿐이라고 했지만 홀리 씨는 48년 동안 세계 산악인들의 히말라야 등정을 기록하며 사실상의 공인 기관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성 세계 최초' 타이틀이 걸린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 논란'에 대해서는 한 발 뺐다. '파사반이 제기한 의혹은 모두 근거 없었다'라거나 '여성 최초 14좌 완등자는 오은선이다'라는 식의 명쾌한 답을 원했던 사람들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은선이 홀리 씨가 정리하는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의 칸첸중가 등정 리스트에서 빠질 일은 없다. 홀리 씨의 등정 리스트를 보면 '논쟁 중' 표시가 붙은 사람뿐만 아니라, 등정의 참/거짓을 나타내는 'TRUE/FALSE'에서 FALSE로 표시된 사람도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고 등정자 수에 집계된다. 결국 여성 세계 최초 14좌 완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둘러싼 논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AP, AFP를 비롯해 각국 언론들의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히말라야 등정을 공인하는 권위 있는 기관 자체가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네팔 관광청은 등정 인증서를 발급하지만 신뢰도는 높지 않다. 네팔등산협회가 '오은선을 14좌 완등자로 인정한다'고 했지만 국내외 산악인들에게 확실한 메시지가 되지는 못한다. 많은 이들이 홀리 씨의 입을 주시했지만 결국 그는 답변을 유보했다.
오은선으로서는 이제 와서 홀리 씨의 말을 무시하기도 힘들다. 지난해 국내에서 칸첸중가 미등정 의혹이 일었을 때 홀리 씨와 장시간에 걸쳐 두 번 인터뷰를 해 인정받았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홀리 씨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논란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파사반과 오은선이다. 파사반이 홀리에게 전한 오은선의 답변을 듣고 '나의 의혹은 모두 풀렸다. 여성 최초 14좌 완등자는 오은선'이라고 말하면 상황은 종료된다. 사실 파사반이 말한 의혹은 빈약하다. 지난해 국내 산악인들이 제기했던 의혹에 비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는 '오은선과 칸첸중가를 올랐던 셰르파 3명 중 2명이 오은선이 정상을 밟지 않았다고 했다'고 말했지만 정작 셰르파의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다. 당시 3명 중 2명인 다와 옹추와 페마 츠링 셰르파는 오은선의 이번 안나푸르나(8091m) 등정에 함께 했다. 둘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터무니없다. 파사반은 거짓말쟁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오은선이 안나푸르나 등정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의혹 제기를 했던 파사반은 많은 산악인들로부터 '비겁한 행위'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내 발언이 이렇게까지 퍼질 줄은 몰랐다"고 다소 물러섰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인 파사반이 의혹 제기를 취소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논란을 끝낼 또 하나의 방법은 오은선이 칸첸중가를 다시 오르는 것이다. 오은선이 '나는 등정을 확신하지만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다면 다시 가겠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은선은 3일 홀리 씨와의 인터뷰를 마친 뒤 가진 외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시비로 다시 오를 생각은 전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국내에서 논란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은선이 칸첸중가를 다시 오르는 사이 파사반이 자신의 마지막 봉우리인 시샤팡마(8027m) 등정에 성공한다면 '여성 최초' 타이틀은 파사반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 오은선의 재등정이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멋진 행동'이 아닌 '미등정에 대한 인정'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잘해야 본전'인 오은선이 칸첸중가를 다시 갈 가능성은 파사반이 마음을 바꿀 가능성보다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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