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네 번째 키커 호아킨 산체스가 오른발 인사이드 슈팅을 날리는 순간 이운재는 미리 예측이라도 한 듯 자신의 왼쪽으로 몸을 날려 공을 쳐냈다. 그리고 두 손을 굳게 맞잡으며 승리를 확신했다. 2002년 6월 22일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일 월드컵 8강전에서 한국이 세계 최강 스페인을 꺾고 4강 신화를 창출하는 순간 이운재는 그 중심에 있었다. 연장까지 120분의 사투를 끝낸 뒤 승부차기 4-3 상황에서 막아낸 그 한 방에 온 국민은 “대∼한민국”을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첫 태극마크 17년만에
골키퍼는 외롭다. 막아도 빛은 나지 않는다. 골을 먹고 패하기라도 하면 모든 비난이 쏟아진다. 이기든 지든 골을 먹으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태극마크를 단 수문장은 스트레스가 더하다.
‘태극 수문장’으로 파란만장한 길을 걸어온 이운재(37·수원 삼성)가 이 짐을 벗는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태극마크를 단 뒤 17년 만에 대표팀 유니폼을 벗는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잠시 대표팀을 떠난 것을 감안하면 13년간 대한민국호 골문을 지켜왔다. 태극마크 최장 기간 보유에서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대표팀에서 뛰었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41)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운재는 11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한국과 나이지리아와의 친선경기 때 공식 은퇴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날 경기에 뛰면 1994년 3월 5일 미국과의 친선경기를 통해 국가대표 간 경기(A매치)에 데뷔한 후 132경기에 출장한 것으로 135경기를 뛴 홍 감독에 이어 역대 두 번째 A매치 최다 출전자가 된다.
“지금이 바로 내가 떠날 시기 후배 위해 자리 비켜주겠다” 11일 나이지리아전서 은퇴경기
○“떠날 때가 됐다”
이운재는 2007년 은퇴의 기로에 섰었다. 당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시안컵 기간에 술을 마신 게 뒤늦게 알려져 큰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준결승에서 이라크에 지고 간신히 3위를 한 것에도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는데 이운재를 포함한 일부 대표팀 주축 선수들이 음주를 한 것으로 밝혀지자 팬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공개 사과를 했지만 팬들의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당시 대표팀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지인들은 전한다.
하지만 K리그에 집중하며 반성했고 1년간의 대표팀 자격정지 뒤 허정무 감독이 다시 부르자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골문을 지켰다. 남아공 월드컵 출전을 놓고도 “해줄 게 없을 것 같다”며 고민을 했지만 마지막으로 봉사하겠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결국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운재는 “지금이 떠날 시기인 것 같다”며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후배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청주상고 1년때 골키퍼 전향 1994 美월드컵 대표 발탁후 A매치 131경기서 골문 수호
○“고마워요 (김)병지 형”
현역 최고령 골키퍼 김병지(40·경남 FC)는 이운재에게 라이벌이자 롤 모델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경쟁을 펼치다 주전을 꿰차며 최대의 라이벌 관계가 됐지만 이운재는 늘 김병지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경기를 보는 시야와 노장임에도 변치 않는 순발력, 그리고 철저한 자기 관리. 이운재는 대표팀에서 떠났지만 체력이 닿는 한 프로 생활은 계속할 계획이다. 그래서 현재 플레잉코치로 뛰고 있는 김병지는 그에게 또 다른 교훈을 주고 있다. 이운재는 “병지 형이 고맙다.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하지만 형이 오래 뛰면 뛸수록 나도 더 뛸 수 있다는 목표와 자신감이 동시에 생긴다”고 말했다.
2002 스페인전 승부차기 선방 사상 첫 월드컵 4강 이끌어
○ K리그 최고 승부차기승률은 계속된다
청주 청남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이운재는 청주상고 1학년 때 골키퍼로 전향한 뒤 지금까지 지나가는 차량 번호판을 외우는 습관이 있다. 빠르게 달려가는 자동차 번호판을 외우는 건 골키퍼에게 훌륭한 상황 판단 훈련이다.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이운재는 역대 K리그 승부차기에서 11승 1패를 기록해 승부차기 승률이 91.7%에 달한다. K리그 최고 승률이다. 이운재는 K리그 12차례 승부차기에서 총 58회의 승부킥 방어에 나섰는데 상대 실축과 선방을 합쳐 26개의 킥을 막아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이운재는 누구?::
생년월일=1973년 4월 26일 충북 청주 출생 출신교=청주 청남초-대성중-청주상고-경희대 소속팀=수원 삼성 포지션=골키퍼 신체조건=182cm, 90kg A매치 성적=131경기 출전 113실점 A매치 데뷔=1994년 3월 미국전 K리그 통산=342경기 356실점 월드컵 출전=1994년(미국) 2002년(한일) 2006년(독일) 2010년(남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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