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모노드라마가 아니다. 그래서 모든 경기에서는 숨은 영웅이 있게 마련.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는 SK 정근우(28)가 그랬다. 정근우는 4경기에 모두 선발출장해 타율 0.313(16타수 5안타)에 5득점을 기록했다. 도루는 1개뿐이지만, 1차전에서 나온 그 도루는 김성근 감독으로부터 “경기의 흐름을 넘어오게 한 도루였다”는 평을 들었다.
정근우는 이전 3차례의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0.186(70타수 13안타)으로 부진했다. “내가 너무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자가진단. 하지만 경험은 여유를 낳았다. “일단 살아 나가는데 집중했다”는 말처럼, 그는 1번과 3번 타순을 오가며 SK 공격의 실마리를 모색했다.
더욱 빛난 것은 수비였다. 3차전 5회말 삼성 박석민의 우전안타성 타구를 병살로 연결했고, 7회말 삼성 조영훈의 중전안타성 타구를 역모션으로 잡아 1루에서 아웃시켰다. 4차전에서도 조영훈의 강습타구를 잇단 호수비로 건졌다. 대한민국 최고 2루수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장면들이었다. 정근우는 “(조)영훈이가 청소년대표시절부터 알던 사이인데, 넌 친구도 아니라고 하더라”며 웃었다.
정근우는 ‘수비는 훈련량’이라는 김성근 감독의 지론을 현실화시킨 선수다. 프로입단 초기, ‘빠른 발 이외에 볼 것이 없다’는 평을 들으며 내·외야를 전전했지만 SK의 지옥훈련 속에서 ‘그물망 야수’로 대변신했다. SK가 추구하는 ‘지지 않는 야구’의 화신으로 불러도 손색 없다. 정근우는 “호수비가 나올 때마다 일부러 세리머니를 크게 했는데 팀 분위기에도 도움이 된 것 같다”며 팀의 심리적 부분까지 챙겼음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