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AG스타] “열여덟 철부지, 첫금 따고 화만 냈죠”

  • 스포츠동아
  • 입력 2010년 11월 20일 07시 00분


발레리나 꿈 접고 얼떨결에 잡은 활시위
방콕대회 실력발휘못해 기쁨보다 큰실망
1등만 하던 나, 올림픽 노메달에 방황도
어머니 충고에 맘잡고 은퇴무대서 3관왕

아시안게임 한국양궁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김진호 한체대 교수가 평생을 조준해온 과녁 앞에 섰다. 아직도 활 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설레는 어쩔 수 없는 양궁인이다.
아시안게임 한국양궁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건 김진호 한체대 교수가 평생을 조준해온 과녁 앞에 섰다. 아직도 활 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설레는 어쩔 수 없는 양궁인이다.
지금이야 한국양궁이 세계 최강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몇 해 전부터는 생활스포츠로 보급되고 있다. 그러나 예전 양궁은 소수만을 위한 귀족스포츠였다. 한 여고생이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녀린 몸으로 금빛과녁을 정조준하며 한국양궁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소녀. 이제는 얼굴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곱게 내려앉았지만 여전히 “선수들이 활시위를 당기는 ‘자태’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는 전설의 궁사. 아시안게임 한국양궁 사상 첫 금메달리스트 김진호 한국체대 교수(49)를 만났다.

● “발레리나가 양궁에 빠지고 말았죠”


김 교수의 원래 꿈은 원래 발레리나였다. 그러나 예천여중 1학년 때 학교운동장 한 귀퉁이에 마련된 양궁장에서 선수들이 활을 쏘는 모습에 그만 마음을 뺏겨버렸다. “사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발레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무용부에서 자꾸 부채춤(한국무용)만 시키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마침 언니친구의 동생이 양궁을 하고 있었고, 그 친구가 ‘활 한 번 쏴볼래?’라고 권해서 냉큼 ‘하겠다’고 했죠(웃음).”

김 교수는 활을 쏘기 시작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전국무대를 장악했다. 손가락 골절상을 당했는데도 1977년 제58회 전국체전 양궁 여고부 개인전 공동 1위에 올랐고 “얼떨결에” 국가대표까지 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태극마크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가족과 떨어져 선수촌 생활을 해야 하는 게 슬픈, 어린 여고생이었다.

● “금메달? 그 의미가 뭔지 몰랐다”

김 교수는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결선 당일 불었던 바람의 세기마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상대는 일본 아베 노리코였다. 김 교수가 13점차로 앞서고 있었고, 양 선수에게는 18발 중 마지막 3발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김 교수가 6엔드 17발째 화살을 그만 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코칭스태프들의 입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3발당 2분(1발당 40초)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지금은 디지털시계가 앞에 놓여있지만 그때는 신호등처럼 빨간불, 파란불, 노란불로 시간을 알려줬거든요. 노란불이 되면 30초밖에 안 남았다는 얘기고 빨간불 들어오면 못 쏘는 거고. 그런데 제가 1발을 먼저 쏘고 나머지 2발은 시간을 꽉 채워서 쏘는 습관이 있었어요. 시간에 쫓기지, 마음은 불안하지 결국 못 쐈죠.”

오버타임이 되면 가장 높은 점수가 깎인다. 어느새 점수차는 3점으로 좁혀졌다. 자칫 잘못하면 역전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러나 김 교수는 덤덤했다. 침착하게 마지막 활시위를 당겼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좋았냐고요? 솔직히…, 아니요(웃음). 금메달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어요. 그냥 제가 종전에 냈던 최고기록보다 기록이 안 좋게 나온 게 화가 나서 얼굴을 구긴 채 경기장을 빠져나간 기억이 있어요.”

김 교수는 40∼41kg밖에 나가지 않는 가녀린 체구 때문에 활도 다른 선수들에 비해 가벼운 걸 들 수밖에 없었고 화살도 약해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상대적 열세를 극복하고 따낸 값진 금메달이었지만 그 가치를 알기에는 (김 교수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세상물정 모르는 코흘리개”였다.

● “나는 기고만장했던 코흘리개였다”

방콕대회 첫 금메달 이후 김 교수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다음해 서베를린에서 열린 제3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30m, 50m, 60 m, 개인종합, 단체전까지 5관왕을 달성했고, 1983 년 LA세계선수권 역시 5관왕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유독 올림픽과 인연이 없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우리나라가 보이콧해 참가하지 못했고, 1984년 LA올림픽에서는 후배 서향순에게 간발의 차로 금메달을 뺏겼다. 김 교수는 처음으로 깊은 좌절감을 맛봤다.

김 교수는 몇 달 동안 활을 잡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생활을 만끽하며 평범한 삶을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진호야, 이왕이면 잘 하고 그만두는 게 어떻겠니”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의 한 마디에 김 교수는 두 말 하지 않고 활을 다시 잡았다. 은퇴는 이미 결정돼 있었다.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가 문제였을 뿐이다. 은퇴무대는 1986 년 서울아시안게임, 그녀는 3관왕을 차지했고 그 자리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사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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