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문(25)이 독기를 품었다. 미 PGA 퀄리파잉스쿨(이하 Q스쿨) 두 번째 탈락. 후배들의 PGA 입성을 바라보며 숨죽이고 있던 배상문이 날카로운 발톱을 세웠다.
새해 첫날을 청계산 정상에서 시작한 배상문은 일주일 동안 체력훈련과 등산을 반복하고 있다. 월, 수, 금요일은 웨이트 트레이닝 위주로, 화, 목, 토요일은 등산을 하면서 자아성찰의 시간을 갖고 있다. 5일 오전 일찍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배상문을 만났다. ‘으∼악’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바벨과 씨름하는 배상문의 표정에서 2011년 새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 Q스쿨 탈락 충격 딛고 새 출발 각오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JKGC 웨이트 트레이닝 센터로 들어서자 훈련 중이던 배상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Q스쿨 탈락으로 ‘혹시 의기소침 해 있지는 않을까’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올핸 동계훈련이 늦네?”라고 묻자 “아직 계획이 없다. 어쩌면 가지 않을 수도 있고요”라고 했다. 의외였다. 동계훈련은 프로골퍼들에게 필수 코스인데 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상했다.
“작년 같았으면 지금쯤 호주나 미국에서 편하게 쉬면서 스윙 교정을 받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변화를 줄까한다.”
이렇게 마음먹게 된 이유는 Q스쿨 때문이다.
“최종 예선을 앞두고 자신감이 넘쳤다. 4명의 한국 선수가 모두 통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한 명이라도 된다면 내가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감이 그만 자만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나는 떨어지고 강성훈과 김비오가 붙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됐다. 기술적인 부분이 아닌 정신력, 즉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모험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훈련을 중단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한다는 건 스스로 큰 결단인 것이다.
“자극도 많이 됐다. 후배들이 먼저 PGA에 진출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부러웠고 속도 상했다. 하지만 일단 게임이 끝났으니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1년 늦게 갈 뿐이고, 더 완벽하게 준비해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 실패 원인은 ‘양파’ 아닌 마음가짐 때문
PGA Q스쿨은 6라운드로 치러진다. 보통 4라운드로 진행되는 대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언제 치고 올라갈지, 반대로 언제 곤두박질칠지 알 수 없는 게 Q스쿨이다. 기대와 달리 첫날부터 실수가 터졌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출발은 좋았다. 2,3번홀에서 버디를 잡아내며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다 보기를 적어냈고 이어서 양파(더블파)까지 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조급해진 것이다.”
한꺼번에 4타나 까먹은 배상문은 심리적으로 불안해졌다. 3라운드에서 순위를 끌어올려 가능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이후엔 퍼트가 말을 듣지 않았다. 배상문은 10월 신한동해오픈 때도 중요한 순간 퍼트가 흔들려 우승을 놓쳤다. 조급함에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게 결국 발목을 잡은 것이다.
“사실 6라운드를 하면서 더블파 하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5라운드가 더 남았으니 매 라운드 마다 보기를 한 개씩 더 쳤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 시작했어야 했는데 빨리 타수를 줄여야 한다는 조급함에 오히려 플레이가 깨졌다.” 배상문은 “더블파를 한 것 보다 그 뒤 혼란에 빠지게 된 순간이 가장 아쉽고 속이 상한다”고 했다.
다행인건 탈락 속에서도 교훈을 얻었다. 올 겨울, 스윙 훈련이 아닌 등산을 택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마음가짐이 문제다. 더 강해져야 한다. 지금까지는 정신적인 면보다 기술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평정심을 갖고 플레이할 때 정상적인 실력을 발휘할 수 있지 조급하고 불안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 “여자친구보다 버디 하나가 더 중요”
요즘 배상문이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너무 아쉬웠다. 다음엔 꼭 통과하길 바란다”는 격려다. “이 말을 들으면 쑥스럽다”고 했다. “아쉽게 떨어지진 않았다. 50위니까 커트라인과는 멀었다. 올해는 이런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PGA 티켓을 따야겠다”고 말했다.
올 시즌 목표가 없는 건 아니다. “일본 투어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고 싶다. 지난 한해 일본에서 경기해 보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층이 두꺼워 좋은 성적을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코스가 워낙 잘 관리돼 있어 한국에서 플레이하는 것보다 편한 느낌이다”
배상문은 올해 일본 투어에 주력할 계획이다. 1승이 목표지만 배상문식 특유의 몰아치기가 살아나면 2승, 3승도 가능하다.
인터뷰를 끝내고 일어나면서 25살 청년 배상문에게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여자친구요? 당연히 여자친구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여자친구보다 경기에서 버디를 하나라도 더 잡아내는 것이다. 그게 내게는 더 큰 행복이고 기쁨이다.”
용인|주영로 기자 na1872@donga.com 사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