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의 올림픽 노메달 비운의 스타
세계선수권 우승 진정한 실력자 입증
전설의 스프린터 어깨 나란히 한풀어
11개월 전, 이규혁(33·서울시청)은 밴쿠버 리치몬드 오벌 빙상장에 드러누워 있었다.
다섯 번째 동계올림픽, 또다시 노 메달. 새파란 후배가 태극기를 펄럭이며 링크를 도는 동안, 큰 형님은 땀으로 젖은 유니폼도 벗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그리고 “안 되는 것에 도전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슬펐다”며 펑펑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좌절은 그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안겼다.
잠시나마 은퇴를 고민했던 그에게 건강한 미련이 남았고, “좀 더 뛰어서 반드시 명예 회복을 하고 링크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각오의 결과는 24일(한국시간) 여실히 나타났다. 이규혁은 네덜란드 헤렌벤에서 끝난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스프린트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 남자 500m 2차시기에서 34초77의 기록으로 1 위를 차지한 뒤 1000m 2차시기에서 1분9 초48로 6위에 랭크됐다.
이로써 전날 500m(1위·34초92)와 1000 m(4위·1분9초65) 1차시기 결과를 합해 종합 1위를 차지했다. 2007·2008년 2연패와 지난해 우승을 포함해 벌써 네 번째 종합 우승. 이고르 젤레조프스키(벨라루스), 에릭 헤이든(미국), 제레미 워더스푼(캐나다) 등 전설적인 스프린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다.
이규혁이 “스프린트선수권에서 우승한 선수가 선수들 사이에서도 인정 받는다”며 남다른 애착을 보였기에 더 벅찬 결과였다.
예고된 성과였는지도 모른다. 이규혁은 지난해 12월 전국남녀스프린트선수권에서 밴쿠버올림픽 500m 금메달리스트인 후배 모태범(22·한국체대)을 꺾고 10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규혁이기에 만들어 낼 수 있는 대기록.
또 이번 대회 500m에서도 모태범(종합 2위)을 두 차례 모두 눌러 최상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후배들의 기세에 밀려나는 듯 했던 베테랑이 다시 한 번 건재를 과시한 것이다.
1994릴레함메르동계올림픽 이후 16년 동안 다섯 차례나 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 빙상 단거리의 선구자. 그 때마다 매번 눈물을 삼켜야 했던 비운의 스타.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의 간판이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여전히 이규혁이라는 사실을 끝내 보여주고 말았다.
이규혁은 곧바로 동계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카자흐스탄 아스타나로 이동해 1500 m 3연패에 도전할 예정. 주종목인 1000m는 이번 대회에서 열리지 않는다.
늘 후배들의 귀감이 됐던 그는 역시 “15 00m는 체력 소모가 심해 운이 따라야 우승할 수 있다. 이제 나보다는 후배 태범이가 금메달을 땄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