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3일, 컬럼비아 1기 필드테스터들이 서울 잠실에서 버스로 3시간30분을 달려 ‘변산마실길’ 들머리 변산해수욕장에 도착하자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망망대해, 모래밭, 갈매기, 바닷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립공원 중 유일하게 반도(半島)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변산반도국립공원’에 마실길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여름부터다. 그 해 여름 14Km를 1단계(1구간)로 하여 조성된 이 길은 2011년 4월 현재, 4구간까지 총 66Km가 완성되었다.
해안선의 모래밭, 해안 농촌의 밭이랑, 옛 군사작전지역 내의 초소간 순찰로, 내변산의 등산로 등을 연결한 길이다. 그러니 바닷가를 걷다가 산길로 접어들고, 때론 밭이랑을 걷기도 한다.
산길을 걸을 땐 가볍게 등산하는 느낌이, 해변을 걸을 땐 동심으로 돌아가고픈 느낌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면 막연한 향수가, 마을 부근 명소를 지날 땐 우리 생활문화의 옛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길을 걷다 보면,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땅에서 살아온 다양한 삶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숙연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컬럼비아 필드테스터 우리 일행이 4월의 봄날 정기산행을 이곳으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고, 날씨 또한 행운이었다. 산길을 걷는 등산로 주변엔 봄꽃 잔치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탁 트인 바다가 아스라했다. 시간도 마침 썰물이라서 넓게 드러난 모래밭은 육지와 바다의 두 생명력을 동시에 지닌 또 하나의 ‘무대’였다. 우리는 이 세 곳의 ‘무대’를 넘나들며 때론 관객이 되었다가 때론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학문을 갈고 닦은 옛 선비가 임금님 계신 북쪽을 바라보며 조정에서 불러주길 기다렸다는 ‘사망암(士望岩)’전망대에 서서 서울 쪽을 바라보니 예나 지금이나 출세를 바라는 범부들의 소망이 공감되었고, 옥녀가 장구 치고 거문고를 탔다는 고사포(鼓絲浦)를 지날 땐 절경풍류를 즐기려는 우리 생활문화의 동질성이 느껴졌다.
고기잡이 나간 어부들의 무사귀환과 바다의 자연재해로부터 마을을 수호해달라고 용왕님께 빌던 수성당(水聖堂)에서는, 우리가 간 그날도 무당들이 기(氣)를 재충전하기 위해서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
드러난 갯바위에는 굴이 서식하고, 모래밭에는 바지락과 꼬마 게가 기어 다니고 주꾸미 낚는 어부들 머리 위로 갈매기가 날았다. 연분홍꽃 산벚나무 아래엔 진달래가 붉게 피었고 파, 마늘 심어놓은 밭섶 들녘에는 쑥, 냉이가 지천이고 꽃다지, 솜나물, 돈나물이 자라고 있었다. 이 모두가 ‘변산마실길’에서 만나고 느낄 수 있는 이 땅의 모습이고, 조상들의 삶의 궤적이고, 현재진행형 우리 삶의 모습이었다.
'변산마실길' 봄나들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다양한 들꽃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한국특산식물인 변산바람꽃은 변산반도에서 처음 발견되어 학명 자체가 '변산바람꽃(Eranthis byunsanensis B.Y.Sun)' 이다. 흰색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꽃받침이며 진짜 꽃잎은 퇴화되어 꽃받침 안쪽에 노란연두빛으로 가녀리게 핀다.
우리나라에만 자생하고 있는 소중한 식물자원이다. 이날 일정관계로 변산바람꽃 자생지를 둘러보진 못했으나, 그대신 우리는 보춘화와 금창초를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보춘화(報春花)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꽃이라는 뜻으로 춘란, 보춘란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중남부 해안지대 숲 속에 자생하고 있다.
금창초는 매우 작은 진보라색 꽃이지만 색이 강렬해 눈에 곧 띈다. 금창초는 금란초, 섬자란초 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남부지방과 울릉도, 제주도에 자생하고 있다. 마실길을 걷는 도중, 곳곳에 노란 갓꽃(갓김치를 담궈 먹는 갓)이 예쁘게 피어 있었지만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변산마실길 여행을 계획한다면 코스를 너무 길게 잡지 말고 야생화와 주위 풍경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도록 여유 있게 잡길 권하고 싶다. 산행이 끝나고 격포항에서 맛있게 먹은 우럭 회, 백합 조개 등의 별미와 서해로 잠기는 석양의 붉은 노을이 파도에 일렁이며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그 모습은 입과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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