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이 스포츠로 하나 되는 과정은 산 너머 산이었다. 남북이 국제대회를 공동 개최하거나 분산 개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분단 이후 단일팀으로 국제대회에 나선 건 2번뿐이다.
남북한이 단일팀을 논의한 건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1963년 1월 스위스 로잔과 5월 홍콩에서 남북체육회담을 연 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남북한의 체육회담은 많이 열렸지만 뚜렷한 결과물은 없었다. 남북한은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에서 단일팀을 구성하기 위해 6차례 회담과 3차례 실무접촉을 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남북 단일팀의 물꼬를 튼 건 1991년의 일이다. 남북한은 1990년 4차례에 걸쳐 판문점 회담을 열어 이듬해 4월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을 출전시켰다. 여자 단체 현정화-이분희 조는 중국을 3-2로 꺾고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시상식장에서는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한반도기가 가장 높은 자리에 게양됐다.
이어 6월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20세 이하)에서 남북 단일팀은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출전해 8강에 올랐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 대신 남북한 공동 입장으로 남북 화해시대를 열었다. 2000년 시드니,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은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함께 입장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와 2003년 아오모리 겨울아시아경기, 대구 유니버시아드에서는 북측이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남북한이 단일팀을 꾸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게 체육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북한은 내부에 문제가 발생했거나 국제사회에 도움이 필요할 때만 화합 카드를 쓰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단일팀을 구성하기 어렵다. 단일팀이 전력의 하향 평준화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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