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승부조작 파문은 올해 말 백년가약을 맺기로 한 두 젊은 남녀에게 큰 시련을 안겼다. 울산 현대 수비수 박병규(29)와 여자친구 김 모양(28)은 12월11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예식장도 잡았고 신혼여행지까지 예약했다. 그러나 박병규가 광주상무 시절 승부조작에 가담한 것으로 밝혀져 모든 게 중단됐다.
●충격 딛고 탄원서 받기 위해
처음 사실을 알았을 때 김 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상무 출신 선수들의 이름이 줄줄이 거론될 때도 남자친구의 평소 성품을 믿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며칠 후 박병규에게 전화가 왔다. “2군 게임을 하러 상주로 간다. 내 축구인생에 마지막 게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상주로 갔다. 90분 동안 관중석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경기 후 돌아오며 ‘오늘이 오빠의 마지막 경기가 되지 않도록 도와야한다’는 생각만 했다.
탄원서가 떠올랐다. 앞 뒤 가릴 것도 없었다. ‘직접 찾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고개 숙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박병규 선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본 여러 분들이 힘을 실어 주십시오’라며 16개 구단에 편지를 썼다.
전화와 답장이 쇄도했다. 1주일도 안 돼 90여명의 선수들이 자필 탄원서를 보냈고, 200여 명의 지인들이 서명을 해줬다. 그녀는 몰려오는 격려 전화와 편지를 보며 ‘내가 사람을 잘 못 보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축구만 계속 할 수 있다면
김 양은 최근 한국프로축구연맹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에서 그녀는 탄원인 대표로 “가족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선수들의 글을 보면 오빠(박병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돈이 목적이 아닌 동료와 의리를 버리지 못해 저지른 실수입니다. 앞으로 저도 좋은 아내가 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오빠가 축구인의 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호소했다.
동료선수들도 발 벗고 나섰다. 박병규과 대학 동기로 절친인 국가대표 김정우(상주상무)는 ‘병규와 10년을 알고 지냈습니다. 절대 돈 때문에 승부조작 할 친구가 아닙니다. 한 번 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썼다. 염기훈과 이용래, 오장은, 이상호(이상 수원) 김형일, 김재성(이상 포항) 등 전현직 국가대표와 이진호, 고슬기(이상 울산) 김영삼(상주상무) 등 박병규와 한솥밥을 먹었던 선수들도 기꺼이 동참했다.
박병규의 소속 팀 울산 트레이너 안덕수 의무팀장의 탄원서를 읽어보면 눈물겹다. 그는 무려 A4용지 3장 분량의 탄원서를 통해 ‘박병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하는 사람입니다. 프로에서 10년 이상 재활트레이너로 무수히 많은 선수를 겪었지만 성실과 노력의 본보기를 꼽으라면 병규는 둘째로 놓기 어려운 선수입니다. 병규가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런 선처를 받아도 될 자격이 있는 녀석입니다’고 부탁했다.
김 양의 부모, 다시 말해 박병규의 예비 장인, 장모도 탄원서를 썼다. 처음 김 양의 부모는 탄원서를 받으러 다니는 딸의 행동을 못마땅해 했다. 딸 가진 부모의 당연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김 양 아버지는 박병규에게 온 탄원서를 딸 몰래 읽어본 뒤 마음을 바꿨다. 구명운동에 적극 나섰다.
김 양은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선수들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남자친구잖아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빠는 제가 끝까지 지킬래요. 이번 사건을 통해 오빠랑 저랑 더 좋은 인생 공부를 했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만큼은 달게 죄를 받아야죠. 그러나 4년을 교체하며 겪은 오빠는 다른 무엇보다 늘 축구가 우선순위인 축구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부디 축구만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윤태석 기자 (트위터@Bergkamp08) sport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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