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女기자가 남자선수 라커룸 막 들어가도 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9일 08시 49분


2002 한일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경주에서 훈련을 끝낸 뒤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거스 히딩크 감독.  연합뉴스
2002 한일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경주에서 훈련을 끝낸 뒤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거스 히딩크 감독. 연합뉴스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대회 개막을 한달 여 앞두고 일어난 해프닝(웃음거리) 하나.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을 두고 각종 언론매체의 취재 경쟁이 본격적으로 불을 뿜기 시작한 때였다.

취재진 사이에 이런 소문이 나돌았다. "한 신문사의 여(女)기자가 취재를 하려는데 히딩크 감독이 무력으로 막았다"는….

당시만 해도 스포츠 계에는 여기자가 드문 편이어서 남자 기자 위주로 구성된 취재진 사이에서는 "여기자에게 그럴 수 있느냐. 히딩크 감독에게 항의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그 여기자에게 상황을 들어보니, 소문과는 딴판이었다.

네덜란드 스페인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던 히딩크 감독은 유럽에서는 많이 보아왔던 여기자를 한국에서는 별로 보지 못하다 항상 현장에 나타나 부지런히 취재를 하는 이 여기자를 보고, 감격한(?) 나머지 그 여기자가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아는 척을 했던 것.

물론 그 여기자도 히딩크 감독의 이런 호감 표시에 웃음으로 답하며 즉석 인터뷰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만족한 터였다.

월드컵축구대회  길거리 응원단에는 여성들도 많이 참여한다.  스포츠동아
월드컵축구대회 길거리 응원단에는 여성들도 많이 참여한다. 스포츠동아
9년 전만 해도 이런 해프닝이 일어날 정도로 스포츠 여기자가 많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특히 TV 매체의 경우에는 스포츠 앵커부터 리포팅을 하는 기자까지 여성들이 대거 등장했다.

과거에도 사회부 사건기자에 비해서도 수가 적을 정도로 스포츠 여기자는 희귀한 존재였는데, 그 이유는 남자 선수의 수가 월등히 많은 스포츠 계에서 여기자들이 왕성한 남자 선수들을 밀착 취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미국에서도 여기자의 프로야구팀 라커룸 취재가 허용된 것이 1978년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사실 라커룸은 선수들이 거의 나체로 돌아다니는 일도 많아 여성들에게는 '금녀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민훈기 야구 해설위원이 쓴 '메이저리그, 메이저리거'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연방법원이 1978년 9월26일 "뉴욕의 메이저리그 팀들이 여기자에게도 라커룸 취재를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로 정했다.

요즘 프로야구 경기장에는 여성 팬이 부쩍 늘었다. 스포츠동아
요즘 프로야구 경기장에는 여성 팬이 부쩍 늘었다. 스포츠동아
당시 여기자의 라커룸 취재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한 팀은 전통의 뉴욕 양키스였는데, 콘스탄스 베이커 모틀리라는 흑인여성 판사가 여기자들의 클럽하우스 및 라커룸 출입 금지를 깬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뉴욕 양키스 팀은 70여 년 동안 열리지 않던 양키스타디움 라커룸의 금녀의 문을 열어야 했고, 이후 여기자의 스포츠 계 참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스포츠 계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경우 여기자라고 해서 특별히 취재를 제한하는 곳은 없다. 단 라커룸이나 숙소 등 개인생활이 보호돼야 하는 장소는 여기자나 남기자나 미리 구단 홍보팀 등을 통해 취재 약속을 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스포츠의 뒷이야기나 특종을 발굴하려면 숙소나 라커룸 등을 수시로 드나들며 지도자나 선수들과의 친밀도를 높여야 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여기자에게는 아무래도 남자 선수들이 대부분인 야구나 축구 등의 종목 취재가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미국처럼 '여기자가 마음 놓고 남자선수의 라커룸 등에 출입해도 된다'는 것을 법으로 정하면 어떨까.

권순일 기자 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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