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1997년 11월10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공항에서였다.
하루 전날 UAE 아부다비에서 열린 1998 프랑스월드컵 지역예선 최종전에서 UAE를 3-1로 이기며 무패로 본선 행 티켓을 거머쥔 한국축구대표팀의 차범근 감독은 7개월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 본선을 얘기하면서 당시 18세의 신예 이동국에 대해 언급했다.
차 감독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신예 한명을 기용할 생긱이다"라고 하자 옆에 있던 한 기자가 "혹시 포철공고에 재학 중인 이동국 아니냐"고 물어봤고, 차 감독은 미소로 답했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명문구단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한 이동국은 차 감독의 부름을 받고 1998년 5월 16일 자메이카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이동국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딱 한번 등장해 13분 여 밖에 뛰지 못했지만 강력한 슈팅을 날리며 인상을 남겼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와의 2차전 후반에 서정원 현 국가대표팀 코치와 교대해 들어간 이동국은 한국이 0-5로 참패를 당한 이 경기에서 '오렌지 군단'의 수비진을 움찔하게 하는 대포알 같은 슈팅을 연거푸 날리며 이날 한국 선수 중 가장 활기찬 플레이를 보였다.
2000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에서 득점왕(6골)에 오르는 등 활약하며 한국축구를 대표할 대형 스트라이커로 떠오르던 그가 부진의 터널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들어간 시기는 2002년 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낙점을 받지 못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왜 그를 엔트리에 포함시키지 않았느냐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필자의 생각에는 베르캄프, 반 호이동크 등 세계적인 대형 스트라이커들이 주축을 이룬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를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이 비슷한 스타일의 이동국이 눈에 차지 않은 것도 있을 것 같고, 원래 성격이 까불까불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과묵하고 다소 무뚝뚝한 스타일의 이동국이 이방인 감독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어쨌든 당시 한국축구가 가진 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의 능력과 업적에 대해서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지만, 이동국의 엔트리 탈락은 이동국 자신과 한국축구의 장기적인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잃은 게 많았다고 본다.
2002년 이후 이동국은 국가대표팀에서 몇 차례 재기의 기회를 잡았으나 이번에는 부상과 불운으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는 십자 인대 파열 부상으로 출전조차 하지 못했고,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는 아르헨티나전과 우루과이전에서 교체 멤버로 투입돼 결정적 기회를 맞기도 했으나 골을 넣는 데는 실패했다.
1998년 A매치 데뷔전을 치른 뒤 13년이 흐른 현재, 쌍둥이 딸의 아빠이자 한국축구 최고참 현역선수의 한명이 된 이동국.
좌절과 불운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프로무대에서 꾸준한 활약을 해온 그가 최근 축구대표팀 조광래 감독의 부름을 받자 또다시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지난 7일 이동국이 폴란드와의 평가전에 오랜만에 선발로 출전한 뒤에는 그의 플레이를 분석하는 기사가 스포츠 언론 매체를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런 기사 중에는 단 한번의 평가전 결과를 놓고 '이동국은 역시 한물 갔다'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경우도 있었다.
UAE와의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3차예선 3차전에서도 이동국은 부상당한 박주영의 교체 멤버로 후반 35분에야 출전해 별로 활약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 경기 후에도 "이동국이 의욕이 없어보였다"라는 식의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동국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가지 당부하고 싶다.
"이제 그만 이동국을 흔들고, 좀 더 지켜보자는…."
2002년 한일월드컵 폴란드와의 첫판에서 첫 골을 터뜨려 4강 신화의 물꼬를 튼 스트라이커가 당시 34세의 '노장 황새' 황선홍(현 포항 감독)이었던 것처럼, 앞으로 2014년 브라질월드컵에서도 한국축구가 신화를 쓰려면 이동국은 분명히 대표팀에 꼭 있어야 할 한국축구의 오래된 대들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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