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8091m)는 ‘풍요의 여신’이란 뜻과는 다르게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히말라야 8000m급 14개 봉우리 중 최초로 1950년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조그와 루이 라슈날에게 첫 등정을 허락했다. 하지만 이후 가장 적은 160여 명만이 정상에 발자국을 남겼다. 안나푸르나가 앗아간 목숨만도 60여 명에 이른다. 4500여 명의 등정을 허락한 에베레스트(8848m)에서 200여 명이 사망한 것에 비해 사고사 비율은 매우 높다.
안나푸르나는 한국 산악인들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1994년 경남산악연맹 박정헌 대원을 시작으로 9명이 안나푸르나 정상 등정의 환희를 맛봤다. 하지만 박영석 원정대 사고 전까지만 해도 10여명의 산악인이 숨졌다.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지현옥 씨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됐다. 1999년 4월 한국-스페인 합동원정대 소속으로 네 번째 도전 만에 정상을 밟았지만 캠프로 돌아오지 못했다. “정상”이라는 짧은 교신만을 남겼다. 당시 엄홍길 대장은 다섯 번째 도전 만에 안나푸르나 정상에 섰지만 동료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2009년 안나푸르나의 산군인 히운출리봉(6641m) 신루트 개척에 도전했던 충북 직지원정대 민준영, 박종성 대원도 목숨을 잃었다. 이들은 해발 4200m 지점을 떠나 정상 공격에 나섰지만 해발 5400m 지점에서 마지막 교신 뒤 연락이 두절됐다.
사고사 말고도 안나푸르나에는 한국 산악인들의 슬픈 사연이 많다. 여성 산악인 김영자 씨는 1984년 안나푸르나에 올랐지만 하산 중 셰르파가 정상 모습이 담긴 카메라를 넣은 배낭을 잃어버려 국제적 등정 인정을 받지 못했다.
안나푸르나는 세계 최초로 여성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 완등을 놓고 경쟁을 펼쳤던 오은선과 고 고미영 씨에게도 회한의 산이다. 둘은 2009년 함께 안나푸르나에 올라 경쟁이 아닌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고미영은 그해 7월 낭가파르바트(8126m)에서 유명을 달리해 ‘안나푸르나의 약속’은 더욱 안타까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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