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이 만난 사람/권순택]‘LPGA 100승’ 최대 공로자 박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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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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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강하게 키운 첫 코치이자 지금도 최고의 코치”

박세리 선수는 카메라를 들이대자 스폰서를 의식한 듯 한국산업은행(KDB)그룹 모자를 고쳐 썼다. 박 선수는 말이나 행동거지가 20대 전성기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졌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란 마지막 목표를 향한 의지는 강했다. 타오위안=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박세리 선수는 카메라를 들이대자 스폰서를 의식한 듯 한국산업은행(KDB)그룹 모자를 고쳐 썼다. 박 선수는 말이나 행동거지가 20대 전성기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졌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커리어 그랜드슬램’이란 마지막 목표를 향한 의지는 강했다. 타오위안=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한국(계) 여자골프 선수들이 이달 16일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100승 드라마’를 완성했다. 1988년 3월 구옥희 선수(55)의 첫 우승 이후 23년 만이다. 이 중에는 미국 국적의 펄 신, 크리스티나 김, 미셸 위의 5승도 포함됐다. 드라마의 대미(大尾)는 사임 다비 LPGA 말레이시아 챔피언 최나연(24)이 장식했다. 100승 드라마의 최대 공로자는 LPGA 통산 25승을 기록한 박세리 선수(34)다.

한국여자프로골프는 1978년 프로 테스트를 통과한 8명으로 출발했다. 첫 테스트에 나간 선수들은 대부분 캐디 출신이었다. 손님들에게 골프채와 골프화를 빌려야 했을 정도로 시작은 미약했다. 이로부터 34년 만에 세계 최고 골프 무대인 LPGA에서 통산 100승이란 창대한 기록을 세운 것. LPGA 61년 역사에 미국 말고 100승 기록을 세운 나라는 안니카 소렌스탐의 72승을 포함해 109승을 올린 스웨덴과 한국밖에 없다. 일본은 36승에 머물러 있다.

2009년 LPGA에 출전한 27개국 122명의 외국선수 가운데 47명이 한국 선수였다. 한국 선수는 현재 세계 여자골프 톱 50에 16명이 들어갈 정도로 세계 여자골프를 주도한다. 미국은 9명, 일본은 12명이다. 대만 타오위안(桃園)의 선라이즈 골프장에서 이달 20∼23일 열린 LPGA 대만 챔피언십에 출전한 박세리 선수를 22일 3라운드 경기가 끝난 뒤 클럽하우스 선수 라운지에서 만났다.

―2010년 5월 벨 마이크로 LPGA 클래식 우승 뒤로는 우승 소식을 들려주지 못했는데요. 100승 기록이 수립된 대회에서 4위를 했고 올해 톱10에도 3번 들어갔는데 요즘 컨디션이 어떻습니까.

“샷감은 좋은데 스코어는 아직 잘 안 나와요. 10월 초 한국에서 열린 하나은행 챔피언십에 출전했을 때 아버님이 보시고 지적해 주신 걸 교정하고 있어요. 제겐 아버지가 첫 코치였고 또 최고의 코치죠. 그래서 샷감이 안정돼 가고 자신감도 생겨 많이 편안해졌어요.”

―34명이 올린 100승 가운데 박 선수가 4분의 1인 25승을 기여했는데….

“100승은 100이라는 숫자 이상으로 어마어마하잖아요. 한국 선수들이 많지만 쉽게 채울 수 있는 우승 수가 아니죠. 제가 25승을 할 때는 너무 정신없이 모든 게 빨리 지나갔어요. 요즘 후배들을 보면서 ‘아 내가 저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보람도 많이 느낍니다.”

―박 선수를 롤 모델로 삼은 ‘세리 키즈’를 보면 기분이 어떤가요.

“처음에는 부담감이 컸죠. 선수들이 가는 길이 힘들거든요. 후배들이 안쓰러울 때도 많았지만 한국 골프를 이끌어 갈 선수들이니까 든든하고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요. 후배들 덕분에 제가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것 같아요.”

세리 키즈 가운데 누가 ‘제2의 박세리’가 될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워낙 실력을 다 갖춘 선수들이라서 누구라고 콕 짚긴 어렵다”며 말을 아꼈다. 그는 “그런 선수들을 위해 저도 힘을 많이 써야죠”라고 덧붙였다. 세리 키즈 중에는 신지애(23·8승)와 최나연(24·5승)이 가장 앞서 있다.

―올해 LPGA 한국 선수들은 비회원인 유소연의 US오픈 우승을 포함해서 2승을 올리는 데 그쳤습니다. 정체기가 아니냐는 말도 있는데….

“기대가 너무 크고 우승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한국만큼 잘하는 나라도 없어요. 우승 수만을 기준으로 부진하다, 정신상태가 어떻다 하는 건 무리죠. 후배들이 힘든 생활을 하면서 잘하고 있어 자랑스럽고 기특해요. 한국 선수들은 실력을 인정받은 상태니까 우승 수를 너무 따지지 말고 기다려줬으면 합니다.”

박 선수가 25승이나 하는 바람에 기대를 높여 놓은 건 아닐까. 그는 “저도 쉽게 우승한 건 아닌데 저 때문에 우승을 너무 쉽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아서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며 웃었다. 사실 미국프로골프(PGA)나 LPGA에는 1승도 못 한 선수가 태반이다.

박세리 선수가 팬이 들고 온 모자에 사인을 해주고 있다.
박세리 선수가 팬이 들고 온 모자에 사인을 해주고 있다.
―경기가 없을 땐 주로 뭘 하고 지내나요.

“연습하고 여가생활도 즐기는 편이에요. TV 프로 ‘1박2일’ 팬이죠. 거기 나오는 음식을 인터넷에서 레시피 보고 만들어 먹어요. 안동찜닭도 해먹었어요.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살고 있는 한국 선수들끼리 스트레스 풀려고 가끔 모여서 와인 마시며 얘기도 많이 해요. 처음 미국 왔을 때는 라면밖에 못 끓였는데 혼자 살다 보니 요리 실력이 늘었어요.”

―아버지가 지금도 ‘골프 대디’ 역할을 하나요.

“아버지 때문에 골프를 시작했고 누구보다 훌륭한 코치시죠. 아버지는 투어 안 따라다니셨어요. 1998년 US오픈 때 처음 오셨죠. 빨리 적응시키려고 혼자 헤쳐 나가도록 강하게 키우셨어요. 1년에 한 번 첫 메이저 대회 때만 오세요.”

―돈도 많이 벌었고 2007년 11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했는데 아직 남은 목표가 있나요.

“커리어(생애) 그랜드슬램이죠. 그 목표를 위해 이번 겨울에 아버지가 올랜도에 오셔서 함께 동계훈련 하기로 했어요.”

박 선수는 LPGA 챔피언십 3승, US오픈과 브리티시오픈 각 1승 등 메이저 5승 기록 보유자다. 하지만 메이저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우승이 없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지 못했다. 나비스코 최고 기록이 공동 9위인데 특별히 코스가 어려워서일까.

“아무래도 기대라는 게 있고 부담이 크죠. 게임이 안 풀리기도 했어요. 내년에는 잘될 걸로 기대해요.” 그는 US오픈만 우승하면 역시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대만의 청야니 선수와 경쟁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는 루이즈 서그스, 미키 라이트, 팻 브래들리, 줄리 잉크스터, 소렌스탐, 캐리 웹 등 단 6명이다.

박 선수는 올해 38만 달러를 포함해 LPGA 14년 통산 상금만 1135만 달러(약 125억 원)를 벌었다. 세계 상금 랭킹 6위. 스폰서와 광고 수입을 포함한 총수입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부모님이 관리해서 모른다”며 답변을 피했다.

―골프의 매력이 뭔가요.

“정상에 있어도 정상에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목표를 세우고 정상에도 올라가 봤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골프는 알면 알수록 더 신비롭고 어려운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으로는 1998년 US오픈 우승을 꼽았다. “모든 메이저 대회 우승이 쉽지 않고 자부심과 명성이 있지만 US오픈은 특별히 다른 것 같아요. 특히 20홀 연장전 끝에 우승했고 당시 한국이 외환위기 상황이기도 했고요.” 기자가 US오픈의 ‘맨발의 투혼’ 소식을 대서특필한 동아일보 PDF 사본을 인터뷰 기념으로 건네자 그는 “참 오래됐네요”라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기뻐했다.

박 선수에게 최악의 해는 2005년이었다. 15개 대회에 출전했지만 톱10에 한 번도 들지 못했다. 평균 타수도 74.21로 최악이었다. 그는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할까.

“골프가 참 어려워요. 18홀을 돌면 정말 많은 일이 생겨요. 지난주에 우승했어도 이번 주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요. 저는 지나간 날들을 돌아봐요. 미국 진출 첫해가 너무 빨리 지나갔고 자기 관리를 못했어요. 몸이 아파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지쳐도 지친 줄 모르고 정신적으로 힘든 줄도 몰랐어요. 슬럼프에 빠진 뒤에야 내가 너무 집착을 많이 했다는 걸 깨달았지요.”

―LPGA에서 뛰는 박 선수 또래인 김미현(34·8승) 한희원(33·6승) 선수는 결혼해서 아들이 있고 박지은(32·6승) 선수도 내년 결혼 계획을 밝혔는데….

“저도 가야죠. 6년째 만나는 한 살 많은 남자친구가 있는데 부모님도 좋아하셔야 (결혼을)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죠. 그 친구는 열 살 때 이민 와서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나지는 못해요. 제가 아는 분과 잘 아는 사이라서 같이 만나다가 사귀게 됐어요. 전에는 프로야구 매니지먼트 일을 했는데 지금은 일반 회사에 다녀요.”(세 자매 가운데 둘째인 박 선수의 언니는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하고 동생만 결혼했다.)

―전성기 때 은퇴해 골프 아카데미를 하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올해 새로운 스폰서(한국산업은행)가 생겼으니 2년 반 정도는 열심히 해야죠. 그 후에는 아직 모르지만 후배들을 훌륭한 선수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어요. 골프 아카데미 한다고 선수 데려다가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요.”

―골프가 인생과 닮았다고들 하지요. 골프에서 배우는 인생의 지혜가 있다면….

“골프란 게 아무래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잘되다가 안되기도 하죠.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죽으라는 법도 없어요. 그래서 골프를 인생에 비유하나 봐요. 골프에서 참 많은 걸 배우게 됩니다.”

프로골퍼는 1년에 약 9개월 동안 투어생활을 한다. 오래전 인터뷰에서 박 선수는 “외로워서 호텔 방에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요즘은 어떠냐고 물었다.

“골프 선수의 삶이 겉보기에는 화려해도 외로워요. 경기가 끝나고 텅 빈 호텔방에 들어가면 뭘 하겠어요. 매주 호텔을 옮겨 다니며 생활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힘들게 경기하고 집에 돌아가도 또 혼자니까 항상 외롭죠. 그래서 해피, 해리, 루비 등 슈나우저 3마리와 같이 살아요.”

―전성기 때와 지금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이제 골프가 좀 재미있다는 걸 알겠어요. 지금은 후배들도 돌보고 여유도 생겼는데 그런 게 많이 변한 거죠. 정신력은 좀 더 성숙해진 편이고 연습은 좀 더 질적으로 바뀌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저 자신이 좀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좋은 거 아닌가요.”

그는 골프 선수로 대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타고난 재능, 선수의 인내심과 인성, 부모님의 열성’을 꼽았다. 결혼해서 자녀에게 골프를 시킬 거냐고 묻자 “본인이 원하면 시켜보겠지만 재능이 없으면 절대 안 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박 선수는 인터뷰 다음 날 4라운드에서 4타를 줄여 15위로 경기를 끝내 상금 2만8268달러를 받았다. 혹시 인터뷰가 경기에 지장을 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서울에 돌아와서 보니 다행히 박 선수의 마지막 라운드 성적이 좋아서 마음이 놓였다.

―대만 타오위안에서

권순택 논설위원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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