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들이 자주 쓰는 용어 중에 ‘얼빠’라는 단어가 있다. 특정 선수, 특히 외모가 출중한 선수를 좋아하는 여성팬을 비하하는 표현인데 팬들 사이에서는 거의 모욕에 가까운 단어이기도 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얼빠’였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그것도 한 선수가 데뷔할 때부터 은퇴하고 코치가 되기까지 무려 20년간 열렬한 팬이니 이만하면 가히 독종 ‘얼빠’ 아닐까.
때는 1992년. 갓 데뷔한 빙그레 투수 정민철(현 한화 투수코치)은 내게 우상이었다. 시원시원한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투구는 몰래 마신 맥주보다 짜릿했고, 어느 날 무작정 찾아간 내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타이르던 모습은 다정한 오빠 같았다. 돌이켜 생각하니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핀잔이었던 듯도 싶지만, 순진했던 나는 그의 한마디에 코피까지 쏟아가며 미친 듯이 공부에 매진했다.
1990년대 중·후반, 한화 이글스의 암흑기를 그는 그렇게 고독한 에이스로 버텨냈고, 나는 그에게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그는 내가 대학생일 때 결혼을 했는데, 난 속이 상한 나머지 그의 차를 긁고 도망가는 만행을 저질렀고(공소시효는 이미 지났지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그가 일본에 진출한 동안에는 야구 캐스터가 되어보겠다고 방송사 문턱이 닳도록 시험을 치다가 족족 미끄러졌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일본에서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와 예전의 불같은 강속구가 아닌 노련한 변화구로 타자들을 돌려세우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고, 내가 변호사가 되어 이런저런 송사에 시달리며 힘겨워 할 즈음 은퇴했다. 은퇴식 날, 그의 공 하나에 울고 웃던 그 모든 세월이 사라지는 듯한 감정에 차마 은퇴식을 다 보지도 못하고 경기장을 빠져나오며 난 참 많이도 울었던 것 같다.
얼마 전 한화 그룹 홍보팀의 요청으로 그를 인터뷰했다. 그는 그 시절 자신이 잘 던지지 못해 팀이 패한 날도 많았다며 팬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말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해사한 얼굴의 소년 에이스는 이제 중년의 코치가 되었고, 그의 이름 석자만 보아도 가슴이 두근대던 나는 이제 서른살을 훌쩍 넘긴 사회인이다. 하지만 그와 내가 함께 공유하는 그 빛나던 시절의 추억은 여전히 살아가는 날들의 고단함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그래서, 난 내가 그의 ‘얼빠’임이 자랑스럽고 그를 사랑하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