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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달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타이틀홀더스에서 우승하며 LPGA 진출 4년 만에 첫 우승컵을 들어 올린 박희영이 1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미소 짓고 있다. 우승 스트레스에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던 그는 요즘 생애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JNA 제공
‘지난해 말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객지 생활 3년째였다. 우승은 멀어만 보였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가는가. 답답했다. 홀로 찾은 미국 집 앞 식당에서 주문한 캘리포니아롤과 국수는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다. 12월의 첫날 서울 강남의 한 카페는 연말을 맞아 모임을 갖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시차 때문에 3시간밖에 못 잤다는 그의 얼굴에도 생기가 넘쳤다. 비음 섞인 목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커피는 달콤했다. “행복하네요. 만나는 사람마다 축하해주고….”
지난달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시즌 마지막 대회인 타이틀홀더스에서 우승한 박희영(24·하나금융그룹)이었다. 전날 금의환향한 그는 바쁜 스케줄을 쪼개 정상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미국 진출 4년 만이자 96번째 도전 만에 이룬 우승이었는데….
“시간이 참 많이 흘렀네요. 미국 가서 1, 2년은 적응기로 생각했어요. 그 다음에는 뭔가 보여줘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뜻대로 안 됐어요. 밝던 성격이 변해 대인기피증까지 생겨 호텔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어요. 서러워 운 적도 여러 번이에요. 그래도 해마다 성장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죠. 거기에 트로피가 마침표를 찍어준 거죠. 10월에 나상욱 프로가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7년 만에 우승하는 걸 보고 코끝이 찡했어요.”
―아쉬운 순간도 많았겠어요.
“2009년 혼다 타일랜드 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겨울 훈련도 열심히 하고 최경주 프로님을 가르쳤던 스티브 밴 코치에게 제대로 배웠어요. 자신감이 넘쳤죠. 그런데 프로암대회 전야제에서 먹은 얼음 때문에 급성 장염에 걸려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1라운드에 7오버파를 쳐 공동 꼴찌를 했는데 사흘 동안 연습 한번 못하고도 18언더파까지 스코어를 내려 준우승을 했어요. 뭔 일 날까봐 의료진이 항상 따라다녔죠. 열이 37도까지 올라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우승 상금이 50만 달러(약 5억6000만 원)인데….
“이번 주에 은행 계좌로 입금된다고 하더라고요. 지난해 미국 첫 집으로 올랜도에 방 3개짜리 콘도를 장만했어요. 대출 받은 것을 갚을 수 있게 됐어요. 의미 있는 상금이라 좋은 데에도 쓰려고 고민하고 있어요.”
2008년 미국으로 건너간 박희영은 올해 독립을 선언했다. 함께 다녔던 매니저와도 결별하고 캐디와 고된 투어생활을 했다. 독립심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타향에서 집 없이 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3년 동안 유랑자 신세였어요. 큰 트렁크 4개를 갖고 다녔죠. 호텔이라면 진저리가 나요. (신)지애가 애틀랜타로 오라고 했는데 캐디가 사는 올랜도 근처에 정했어요. 혼자 밥 사먹는 게 싫어져서 집에서 삼계탕, 스파게티, 스테이크도 해먹고 다녀요.”
―토끼띠인데 토끼 해가 가기 전에 우승을 했네요.
“운동할 때부터 동기가 너무 없었어요. 국내에서도 두세 명밖에 안 됐는데 그나마 다 관두고…. 한 해 아래인 1988년생 용띠들은 최나연, 신지애, 김송희, 김인경 등 너무 많아요. 친구들이 있으면 의지라도 됐을 텐데요.”
―동료 선수들로부터 최고의 스윙을 지녔다는 평가를 들었죠.
“팔이 길어서 스윙이 시원스럽게 보이나 봐요. 아버지(박형섭 대림대 사회체육과 교수)의 영향으로 단단하면서 균형 잡힌 스윙을 배웠어요. 피아노와 바이올린, 발레 등을 배운 것도 도움이 돼요. 리듬에 대한 센스와 균형 잡는 요령 등을 자연스럽게 길렀죠.”
―올 시즌 LPGA투어에서 평균 드라이버 비거리 259야드(17위)로 장타에 속하는데….
“스윙이 강한 것도 아니고 유연함이 비결 같아요. 군더더기가 없는 스윙으로 임팩트 때 갖고 있는 힘을 100% 다 전달하면서 거리가 나는 것 같아요.”
박희영의 어프로치샷 모습. 타고난 장타자인 그는 부드러운 스윙이 일품이다. 동아일보DB 박희영은 한때 쌍꺼풀 수술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한창 외모를 따질 나이다.
―주위에서 예뻐졌다는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2005년 한영외국어고 졸업반 때 대표팀 선배였던 언니가 성형외과 의사로 일하는 이모부에게 상담 받으러 간다고 같이 가자는 거예요. 얼떨결에 했는데 너무 세게 됐나 봐요(웃음). 한 번씩 쌍꺼풀이 풀리기도 하는데 너무 진해졌어요. 치아 교정 효과도 봤어요. 여드름도 많았는데 미국 물이 좋은지 신경 안 써도 좋아졌네요.”
―LPGA투어에서 코리아 군단의 101번째 챔피언인데 200승을 향한 첫 단추를 끼운 건가요.
“(박)세리, (김)미현, (박)지은 언니를 보고 미국에 갔어요. 저 역시 후배들에게 꿈을 주고 싶어요. 올해 한국 선수 우승이 적어 아쉬워하는 분이 많다고 들었어요. 다들 치열하게 하고 있어요. 후배들도 많이 도전해 봤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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