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진영(32·LG 외야수)은 9년 전인 2003년을 잊지 못한다. 그는 SK 소속 고졸 5년차로 멋모르고 열심히 야구하던 ‘꼬마’였다. 2002년 처음 3할 타율(0.308)을 기록하며 자신감도 많이 붙었다.
2003년 시즌을 앞둔 어느 날, 하늘 같은 팀 선배 김기태(LG 감독)가 그를 부르더니 내기를 제안했다. “올해도 3할을 치면 최고급 방망이 20자루를 선물하겠다”는 거였다. “제가 지면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자 당시 선수였던 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소주나 한잔 사.”
그해 이진영은 타율 0.328을 기록하며 타격 5위에 올랐다.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도 기여했다. 김 감독은 사비를 털어 흔쾌히 방망이 20자루를 사 줬다.
#2. LG의 중고참이 된 이진영은 지난해 8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LG 2군 감독이었던 김 감독은 당시 수석코치로 1군에 합류했다.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LG의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LG는 시즌 초반 선두권을 달렸지만 후반기 들어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김 감독은 분위기 반전을 위해 머리를 박박 깎고 운동장에 나타났지만 팀의 하락세는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경기를 지고 난 뒤 운동장을 나오는데 한 팬이 다가오더니 “이진영 선수, 제발 야구 좀 잘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이진영은 “초등학교 때 야구를 시작한 뒤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너무 창피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존심이 엄청 상했지만 할 말이 없어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각종 부상에 시달리며 10년 만에 최악의 성적(타율 0.276, 1홈런, 37타점)을 냈다. 팀은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3. 전지훈련을 앞둔 이진영은 요즘 마음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 팀의 10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서도, 개인적인 자존심 회복을 위해서도 중요한 한 해다. 올해는 또 LG와의 4년 계약의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더구나 지난해 수석코치였던 김 감독은 올해 신임 사령탑이 됐다. 이진영은 “어릴 적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최고의 왼손 타자였던 감독님은 롤 모델이었다. 감독님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감독님을 위해서라도 야구를 잘하고 싶다”고 했다.
올 시즌 그가 생각하는 역할은 분위기 메이커다. 그는 “사실 실력으로만 보면 상위권 팀들과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런데 성적이 좋지 않을 때 우리 팀은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 경험 많은 고참으로서 어린 선수들을 잘 다독여 좋은 때건 안 좋은 때건 LG의 야구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진영은 올 시즌 타격왕을 목표로 잡았다. 2004년에 기록한 타격 2위(타율 0.342)를 넘겠다는 각오다. 그는 “개인 성적보다 타율을 올리는 게 팀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고 했다. 이진영에게 2012년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김기태 LG 감독은 선수 시절부터 강한 카리스마로 유명했다. 친근한 형님이었지만 팀워크를 해치는 행동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LG 선수단이 최근 자체 회의를 통해 수정한 상벌 규정에는 이 같은 김 감독의 의지가 반영됐다.
먼저 팀을 비방하거나 내부 정보를 유출한 경우에는 벌금 1000만 원을 물리기로 했다. 선수단 내 도박 행위나 폭행 등도 1000만 원이다.
지각하는 선수 역시 처벌 대상이다. 지난해에는 벌금 5만 원이었지만 올해는 10배나 많은 50만 원으로 책정했다. 한 선수가 “10번 지각하면 500만 원을 내야 하는데 액수가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김 감독은 “10번 지각할 때까지 그 선수는 팀에 남아 있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뼈있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밖에 전력질주를 하지 않거나 늦게 베이스 커버에 들어오는 느슨한 플레이에도 수백만 원의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김 감독은 채찍만큼 당근도 준비했다. 팀을 위해 헌신하고 팀플레이에 모범을 보이는 선수에겐 사비를 털어서라도 확실한 보상을 해줄 계획이다.
김 감독은 최근 실시한 체력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박현준과 김태군, 우규민, 유원상 등 주축 선수들을 과감하게 전지훈련 명단에서 제외했다. 신상필벌의 원칙을 지켜 팀을 새롭게 변화시키겠다는 ‘김기태식 리더십’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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