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 인 스타] 박종길 선수촌장, 태릉서 40여년…집보다 편해

  • Array
  • 입력 2012년 1월 17일 07시 00분


스물셋 뒤늦게 잡은 권총
총 잡고 하도 뛰어다녀 간첩 오해도
아시안게임 金 3 ‘한국사격 자존심’

세계정상 오르지 못한 한
후배들에 든든한 지원사격으로
대신 풀고 싶어

채 200일도 안 남은 런던올림픽
레슬링·복싱·체조 앞세워
금 10개·종합10위 수성해야죠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1970∼1980년대 한국사격의 간판스타에서 대표팀 지도자, 이후 체육행정가까지. 40여년 세월
 동안 박종길 선수촌장의 변신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삶의 터전은 오로지 태릉뿐이었다. 아시아의 권총스타였지만 
올림픽과 인연을 맺지 못했던 아쉬움은 이제 후배들을 통해 풀 생각이다. 태릉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1970∼1980년대 한국사격의 간판스타에서 대표팀 지도자, 이후 체육행정가까지. 40여년 세월 동안 박종길 선수촌장의 변신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삶의 터전은 오로지 태릉뿐이었다. 아시아의 권총스타였지만 올림픽과 인연을 맺지 못했던 아쉬움은 이제 후배들을 통해 풀 생각이다. 태릉 |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beanjjun
런던올림픽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7월27일 개막하는 2012런던올림픽이 약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9일 훈련개시식을 시작한 태릉선수촌에서는 태극전사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런던의 영광을 준비하고 있다. 2011년 1월 취임한 박종길(66) 선수촌장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2011년 11월 문을 연 충북 진천선수촌과 태릉을 오가며, 선수·지도자들 독려에 여념이 없다. 12일 박종길 선수촌장을 만나 그의 인생행로와 올림픽 준비상황 등을 들었다.

○세계 제일의 선수촌장이 목표

박종길 선수촌장은 1970∼1980년대 한국사격의 간판스타였다. 1990년대에는 국가대표팀 사격감독을 맡았다. 선수촌장으로 취임한지는 만 1년이지만, 그는 “태릉에서 40여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했다.

지금은 태릉의 외진 구석까지 소상히 알 정도다. 그에게 태릉은 집이자, 직장이자, 열정의 터전이다. 지금도 태릉에서 선수들과 함께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는 일은 외부 행사가 있을 때가 전부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주말에 잠시 뿐…. 그는 “선수들도 일주일 내내 고생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집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며 웃었다.

태릉의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 먼동이 틀 때쯤이면, 그도 선수들과 함께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트랙을 달린다. 분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덕분에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강골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여전하다.

“호주, 중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의 선수촌을 가봤어요. 올림픽을 준비하는 선수들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지원시스템 역시 훌륭하고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타국의 선수촌장들과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들이 시상대 가장 높은 곳을 꿈꾸며 힘든 시간을 견뎌내듯이, 저 역시 세계의 선수촌장 중에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소통의 장 열리니, 지원도 적시적소에 술술


취임 당시 그가 강조한 것은 “선수, 코칭스태프와의 소통”이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다가서겠다’는 포부였다. “제가 선수 때만 해도 선수촌장이 지나가면, 다들 어려워했어요. 그만큼 거리감이 있는 존재였지요. 선수·코칭스태프가 어떤 것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정확한 지원을 할 수 있습니다. 저와의 문턱이 너무 높으면 그런 이야기들이 편하게 오고 갈 수가 없어요.”

처음에는 선수·지도자로 태릉에서 잔뼈가 굵은 그를, 도리어 부담스러워하는 시선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의 다정다감한 면에, 태릉의 선수·코칭스태프들도 마음을 열었다. 마침내 자연스럽게 소통의 공간이 열렸다.

“복싱대표팀에서 월계관(태릉선수촌내 웨이트트레이닝장)에도 샌드백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죠. 하지만 이유를 들어보니 충분히 납득이 되더라고요. 서키트 트레이닝(무산소·유산소를 번갈아가며 실시하는 순환운동)을 한 후 녹초가 된 상태에서 샌드백을 때리면 경기력이 더 향상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전에서 체력이 바닥난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지요.”

월계관에는 바로 샌드백이 설치됐다. 2011년 11월, 대한체조협회와 태릉선수촌이 선수촌내에 새로운 포디움(선수들이 종목 연기를 위해 올라가는 일종의 단)을 준공한 데도 박 촌장의 도움이 컸다. 관계자들은 “국제규격에 맞는 새 포디움이 런던올림픽을 대비한 실전감각을 키우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종길 촌장 선수시절 권총을 잡은 모습.
박종길 촌장 선수시절 권총을 잡은 모습.

○귀신 잡는 해병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까지

훈련 지원 부분에 특히 신경을 쓰는 것은, 그 역시 한 때 세계 최고를 꿈꿨던 선수로서 그 필요성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박 촌장은 1974테헤란아시안게임 센터파이어권총 은메달, 1978방콕아시안게임 속사권총 금메달, 1982뉴델리아시안게임 스탠다드권총 금메달, 1986서울아시안게임 속사권총 금메달 등 화려한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당시는 북한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의 시대였다. 박 촌장은 1982뉴델리아시안게임 권총종목에서 7관왕을 차지한 북한의 사격영웅 서길산(58)의 유일한 대항마였다. 특히 주종목이었던 속사에서는 한국사격의 자존심을 지켜주곤 했다.

그는 군 입대 이후에야 뒤늦게 사격에 입문해, 아시아정상까지 올라 간 입지적인 인물이다. “해병대에 들어간 이후 23세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사격을 시작했어요. 해병대 사격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베트남 파병이 예정돼 포항에 내려가 있었는데….” 그 때 급작스럽게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이던 박종규 씨가 대한사격연맹 회장직을 맡으며, 1971아시아사격선수권을 서울에 유치했기 때문이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은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사격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는 아시아선수권도 대단히 큰 국제대회였어요. 개최국으로서 성적은 내야하는데, 선수가 없으니 사격을 잘 하는 군인들을 차출한 것이었죠.” 결국 박 촌장은 1971아시아선수권 센터파이어권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세계정상에 서지 못한 한, 후배들 지원으로!

남들보다 늦게 총을 잡은 만큼 훈련량은 처절할 정도였다. “사격을 잘 하려면 평형감각이 좋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총을 오른손에 감고, 태릉사거리부터 화랑대역까지 철길 위를 걸었어요. 처음에는 뒤뚱거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눈을 감고도 20∼30m는 가겠더라고요. 제 주종목인 속사권총은 4초 동안 5발을 쏴야 해요. 순발력과 민첩성을 강화하기 위해 태릉선수촌 뒤 불암산 소나무 숲 사이를 총을 들고 뛰어다니기도 했어요. 한 번은 간첩으로 오인 받은 일도 있었지요. 하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훈련법이지만, 과학적인 사격 트레이닝법이 없던 시절 그가 자기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였다. 하지만 성실성과 끈기만으로는 세계 정상에 서는데 한계가 있었다. 1984LA올림픽에서 박 촌장은 한국사격의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예상대로 첫 날 성적은 좋았다.

“LA에 도착하고 나서 계속 어깨가 아팠어요. 올림픽에 대한 욕심 때문에 너무 과하게 훈련한 탓이었죠. 나중에는 어깨를 들지도 못하겠더라고요. 당시에는 팀 닥터나 물리치료도 없던 시절이니까…. 하지만 우려와 달리 첫 날 총을 잘 쐈어요. 금메달도 충분히 바라볼 수 있는 점수였지요. 그런데 막상 세계정상이 눈에 보이니까, 이번에는 마음이 흔들리더라고요. 사격에서는 마인드 컨트롤이 가장 중요한데, 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거예요.”

결국 그는 1984LA올림픽에서 메달획득에 실패했다.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들 사이에서는 아주 작은 부분 때문에 승패가 갈립니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은 물론이고 부상 치료법과 스포츠심리학의 중요성까지 커지고 있어요. 그래서 선수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가 선수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이 선수생활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후배들이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10-10전략, ‘지금 땀방울부터 자신감을 훈련하라!’

한국은 2008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13개, 은메달10개, 동메달8개로 종합 7위의 성적을 거뒀다. 안방에서 열린 1988서울올림픽(금12·은10·동11·종합4위) 이후 최고성적이었다. 대한체육회는 2012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 10개, 세계 10위권 이내 수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베이징에서 금메달 4개를 땄던 태권도, 금메달 2개를 땄던 역도의 전력이 다소 약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노골드’였던 레슬링, 복싱, 체조 등에서 세계 정상의 문을 두드려 볼만 해요. 전통적인 강세종목인 양궁은 물론이고, 유도·수영·사격·배드민턴·펜싱 등에서도 금메달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박 촌장은 “아직도 선수시절, 시상대에 섰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른다”고 했다. 태극기가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리는 순간. 온 몸에는 전율이 퍼지고, 피땀을 흘렸던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찰나의 희열은 몸 주변을 감싼다.

“그 때의 느낌을 선수들에게 전하곤 합니다. 그렇게 정상에 서려면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자신감이 생기거든요.”

어둑어둑 밤하늘이 태릉을 감쌀 무렵. 월계관에서 한 무리의 선수들이 나와, 선수촌장실 앞을 지났다. 뜨겁게 달궈진 선수들의 몸은 찬 대기를 만나자,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있었다. 흐뭇한 표정의 박 촌장은 “선배들이 쌓아 온 영광을 이번에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느냐”며 미소를 지었다.

박종길은 누구?

▲1946년 5월10일생
▲1971서울아시아사격선수권 센터파이어권총 금메달
▲1974테헤란아시안게임 센터파이어권총 은메달
▲1978방콕아시안게임 속사권총 금메달
▲1982뉴델리아시안게임 스탠다드 권총 금메달
▲1986서울아시안게임 속사권총 금메달
▲1992.1∼1996.12 국가대표 사격감독
▲2008.9∼2009.3 대한체육회 이사
▲2011.1∼현재 대한체육회 선수촌장
▲1979.4 체육훈장 거상장
▲1986.10 체육훈장 맹호장

태릉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트위터@setupman11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