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삼성)이 2005년 일본 프로야구 롯데에서 뛸 때의 일이다. 당시 롯데 사령탑이었던 보비 밸런타인 감독은 운동장에서 훈련하던 선수들에게 갑자기 “명상을 하라”고 했다. 뜬금없는 지시였지만 모든 선수는 군말 없이 이에 따랐다. 일본에서 감독은 ‘신(神)’이나 마찬가지다. 선수단 구성부터 팀 운용까지 감독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일본 감독들은 선수들에 대해 쓴소리도 자주 한다. ‘불호령’을 뜻하는 ‘가미나리(雷)’란 기사 헤드라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본에서 신 대접을 받던 밸런타인 감독이 미국에서 굴욕을 당했다. 올해 메이저리그 보스턴 감독으로 컴백한 그는 16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부진에 빠진 4번 타자 케빈 유킬리스에 대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경기에 임할 자세가 돼 있지 않다”고 말한 게 발단이었다.
일본에서와는 달리 보스턴에선 난리가 났다. 유킬리스는 이튿날 “감독의 정확한 의중을 듣고 싶다”며 감독실을 찾아갔다. 팀 동료들도 유킬리스의 편에 섰다. 더스틴 페드로이아는 “일본에선 그런 말이 통할지 몰라도 여기선 아니다”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밸런타인 감독이 유킬리스에게 사과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팀 분위기는 말이 아니다. 팀 성적도 20일 현재 4승 8패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최하위다.
이번 소동은 일본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서 비롯됐다. 일본이 ‘감독의 야구’라면 미국은 선수가 중심이다. 일본에선 선수 못지않게 고액 연봉을 받는 스타 감독이 많다. 그러나 선수 평균 연봉이 344만 달러(약 38억 원)에 이르는 메이저리그에선 100만 달러도 못 받는 감독이 수두룩하다. 일본에선 ‘보비 매직’이란 찬사를 받으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 밸런타인 감독도 미국에선 평범한 감독 중 한 명이라는 얘기다.
그럼 한국 야구는 어떨까. 한국 역시 현재까지는 감독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하지만 김태균(한화)처럼 연봉 15억 원을 받는 선수가 나오고 야구선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선수협의회의 영향력도 강해지고 있다. 요즘 같은 추세로 한국 야구가 더 발전한다면 10년 후에는 미국식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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