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대(24·삼성전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 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뒤 중계 카메라를 향해 ‘깜짝 윙크’를 날렸다. 헌신적으로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 이애자 씨(50)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7월 27일 개막하는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뒤에도 음으로 양으로 이들을 도운 ‘엄마’들이 있다. 본보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이들을 키운 엄마들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THANK YOU, MOM! 시리즈’의 첫 번째 주인공은 역도 선수 장미란(29·고양시청)을 키운 이현자 씨(54)다.》 딸은 일주일째 말을 하지 않았다. 밥상을 차려놔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식구들이 밥을 다 먹고 난 뒤 동생이 새로 상을 차려주면 그제야 겨우 숟가락을 들었다. “엄마가 억지로 역도를 시켰기 때문”이라는 게 냉전의 이유였다.
엄마도 처음엔 딸을 평범하게 키우고 싶었다. 여느 여자아이처럼 예쁜 옷을 입히고 피아노 학원을 보냈다.
역도를 시키려고 마음먹은 건 중학교 2학년이던 1997년 여름 방학 때였다. 딸은 아마추어 역도 선수 출신인 아빠의 힘과 뜀박질을 잘했던 엄마의 순발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덩치가 컸지만 학교 체력 테스트에서 달리기와 멀리뛰기를 했다 하면 1등이었다. ‘역도를 하면 잘할 것 같다’고 확신했다. 싫다는 딸의 손을 억지로 끌다시피 역도부에 데려갔다. 그런데 역도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어디선가 “쟤는 남자보다 덩치가 크다”는 말이 들렸다.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한 딸은 곧바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공부를 잘했다면 딸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원하던 고교에 갈 성적이 되지 않자 엄마는 다시 딸을 강제로 역도부로 보냈다. 세계에서 가장 힘 센 여자가 된 역사(力士) 장미란의 탄생이었다.
○ 세계 챔피언을 키운 칭찬의 힘
출생 당시 몸무게가 4.00kg으로 다소 큰 편이었지만 장미란은 어린 시절 그저 통통한 정도였다. 그림 그리기와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보통 여자 아이였다.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에 들어서면서 먹성이 좋아지더니 살이 찌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 씨의 고민이 시작된 게 이 즈음부터다. “더 먹겠다”는 딸과 “그만 먹어라”는 엄마의 신경전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최근 강원 원주의 집에서 만난 이 씨는 “2년 넘게 체중 조절하라며 잔소리를 많이 했다. 딸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계모’가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장미란이 역도를 시작하면서 더이상 ‘먹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쓰기 위해선 잘 먹어야 했다. 처음엔 싫다며 울고불고하기 일쑤였지만 장미란은 곧장 역도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바벨을 잡은 지 열흘가량 지났을 때 시험 삼아 출전한 강원도내 중학생 대회에서 덜컥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당시 출전 선수는 장미란을 포함해 2명뿐이었다. 하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겐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된 소중한 우승이었다.
이후 장미란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역도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성인 무대를 제패했고,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에서는 은메달을 따냈다. 엄마도 덩달아 신이 났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다” “천부적으로 타고났다”는 칭찬 속에 장미란은 매년 자신의 기록을 경신해 나갔다.
○ 베풂과 배려를 가르치다
장미란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역도 최중량급(75kg 이상급)에서 세계기록(326kg)으로 금메달을 따며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하지만 최고 스타가 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겸손하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항상 베풀기 위해 노력한다.
장미란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일화 한 토막. 고양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2009년 겨울. 역도 선수를 꿈꾸는 형제가 장미란을 만나기 위해 서울 태릉선수촌에 찾아왔다. 장미란은 이들의 고민을 듣고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더니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10여 분 후 장미란은 두 손에 역도화와 잠바를 들고 나타났다. 대화 도중에 형의 역도화 사이즈가 자신과 같다는 걸 들은 장미란이 숙소에 가서 이를 챙겨온 것이다. 그는 “내가 신으려고 사놓은 역도화인데 새 거야. 잠바는 몇 번 입은 건데 미안하다”며 형에게는 역도화를, 동생에겐 잠바를 선물했다.
이 같은 나눔과 배려의 정신은 어릴 적 어머니 이 씨로부터 배운 것이다. 장미란이 다니던 초등학교 근처에는 어려운 소년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시설이 있었다. 딸의 생일날이 되면 이 씨는 장미란에게 “생일잔치에는 엄마, 아빠 없는 애들만 초대해”라고 했다. 시설의 아이들이 오면 이 씨는 잔칫상을 차리고, 목욕을 시키고, 저녁까지 먹여서 보냈다. 이 씨는 또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를 싸게 대량으로 구입해 살림이 어려운 집에 보내곤 했다. 이때의 심부름은 장미란과 두 동생이 했다. 이 씨는 “우리도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지만 주는 걸 좋아했다. 그런데 남에게 베풀면 이상하리만치 주위에서 생기는 게 많더라. 미란이도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고 했다.
○ 고맙다, 사랑한다 딸
장미란은 “엄마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행복하게 역도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어머니 이 씨는 장미란을 “그냥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딸”이란다. 장미란이 원주에 있는 집에 들를 때면 아직도 엄마와 함께 잠을 잘 정도로 모녀 관계는 각별하다. 모녀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서로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이 씨는 “가세가 기울었던 1990년대 말 몇 년간 곰탕집을 했다. 당시 다섯 식구가 식당에 딸린 단칸방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그때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당시는 장미란이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고교생이던 장미란은 힘든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곰탕 그릇부터 날랐다. 두 동생과 함께 설거지와 청소도 도맡아 했다.
식당은 오전 6시에 문을 열어 다음 날 오전 2시에나 닫았다. 집에는 목욕탕이 없어 장미란은 손님이 다 빠져나간 뒤에야 주방에서 몸을 씻었다. 샤워를 하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온 날도 있었다. 그래도 장미란은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이 씨는 “다섯 식구가 사는 그 좁은 방에 피아노가 있었다. 가끔씩 미란이가 피아노를 쳐 줬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렸다”고 했다.
장미란은 7월 27일 시작되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엄마는 마음으로 장미란과 함께한다. 이 씨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미란이가 아프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꺼칠해진 손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고생한 만큼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좋겠다. 올림픽 2연패에 성공하는 역사적인 인물이 되게 해 달라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한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이 씨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힌 듯했다. “힘내, 우리 딸. 고맙고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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