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들 맞아요.” 순순히 인정해버렸다. 사람들은 한 살배기 딸을 “아들이냐?”고 물었다. 애써 설명하기 귀찮을 정도로 자주였다. 태몽은 산 중턱 호수에 떠 있는 연꽃이었는데…. 딸은 남자아이처럼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뛰어놀기를 좋아하고 목소리도 컸다. 딸이 훗날 ‘국민 여동생’으로 사랑받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18·세종고)를 키운 어머니 윤현숙 씨(44) 얘기다.
○ 남자아이 같던 연재
안전하게 뛰어놀 공간이 필요했다. 여성스러움도 함께 키울 수 있다면 금상첨화. 고심 끝에 여섯 살 무렵 리듬체조, 발레, 무용을 함께 가르치는 클럽에 딸을 보냈다. 윤 씨는 처음 딸의 손을 잡고 체육관에 간 날을 아직 잊지 못한다. “그렇게 행복한 미소는 처음이었어요. 머슴아이 같던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게 보였어요.”
손연재는 리듬체조 명문인 서울 광진구 세종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영재로 자랐다. 초등부대회에선 적수가 없었다. 하지만 엘리트 선수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취미나 특기 정도로만 여겼다. 가족이나 친척 중 운동선수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메달이 늘어가면서 불안했어요. 운동하다 실패하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지요. 우리 집안엔 스포츠 DNA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엄마는 딸에게 공부도 열심히 시켰다. 딸은 교내 수학경시대회, 영어듣기평가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로 영특했다. 초등학교 4학년 이후 딸이 일본, 뉴질랜드 등지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나갈 때면 아예 한두 달씩 현지에 체류하며 어학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운동이냐 공부냐.’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선택의 순간은 다가왔다. 결정은 온전히 딸에게 맡겼다. 엄마는 ‘경우의 수’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뿐이었다. 딸은 엄마를 다독이며 말했다. “엄마 리듬체조가 내 평생 일인 것 같아.” 그 순간 엄마는 더이상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 어른스러운 독종 연재
헌신적인 엄마가 돼야 했다. 먼저 손연재가 진학한 광진구 광장중 주변으로 이사를 했다. 전세금은 비싸졌는데 평수는 되레 작아졌다. 경기복도 한땀 한땀 손수 만들었다. “내가 손수 만든 옷을 입고 연재가 매트에서 실수 없이 연기를 잘 마무리할 때만큼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러시아로 떠날 때도 딸의 선택을 믿었다. 훈련 환경의 변화 없이는 세계와의 격차를 줄이기 어려웠다. 2010년부터 딸은 시즌 대부분을 세계 최강 러시아 국가대표팀의 훈련소가 있는 모스크바 인근 노보고르스크에서 보내고 있다. 그 결과 딸은 국내 최강자가 되는 것을 넘어서서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 동메달리스트로 성장했다. 올 시즌에는 한국 리듬체조 사상 최초로 국제체조연맹(FIG) 월드컵시리즈 두 대회 연속 동메달도 따냈다.
딸은 독하다. 어떤 어려움도 잘 견딘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엄마에게 살짝 귀띔하곤 한다. 러시아에서 전화할 때는 절대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른스러운 딸 때문에 며칠 전 눈물을 쏟았다. 딸이 초등학교 때 체벌을 받으며 운동했다는 사실을 털어 놓은 것이다. “운동시키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부모로서 지금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한스러웠다.”
○ 엄마와 함께 행복한 연재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꿈꿨던 런던 올림픽 무대를 앞두고 엄마는 차분해지려 애쓴다. 여느 스타들처럼 정점을 찍고 내려올 일만 남은 인생을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해요. 가진 재능이 많은 아이인데, 올림픽 결과에 따라 모든 삶이 좌우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딸도 엄마의 행복을 생각하고 있다. 사생활까지 포기해가며 자식의 성공을 위해 다걸기(올인)하는 스포츠맘이 되지 않길 바란단다. 운동선수인 딸과 뒷바라지하는 엄마가 항상 붙어 있는 경우가 많은 ‘스포츠 모녀’들은 자주 갈등을 겪기도 한다. 딸과 엄마는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한다. 윤 씨는 딸에게 부담을 줄까 봐 런던 올림픽도 조용히 숨어서 지켜볼 생각이다. “마음속으로 딸을 많이 내려놓으려고 해요. 연재도 행복하고 엄마도 행복해야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 아닐까요? 연재야 런던에서 훨훨 날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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