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주·이승엽 주포 빠지고 박진만은 중도하차 출발부터 난항 불구 첫 대회보다 좋은 성과 일궈
우스갯소리로 ‘거북선 코리아’라고 불렀다. 김인식 감독은 ‘이순신 장군’으로 통했다. 일본이 자신 있게 내세운 ‘사무라이 재팬’에 대항하는 이름. 그러나 2009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는 별명이기도 했다. 당시 많은 야구전문가들은 WBC 대표팀을 ‘역대 최약체’로 평가했다. 2006년 1회 대회 때는 물론 불과 몇 개월 전 열린 2008베이징올림픽 때보다 더 힘들게 짜여진 팀이었기 때문이다.
2006년 대표팀은 투수진에 박찬호(샌디에이고·이하 당시 소속팀), 서재응(LA 다저스), 봉중근(신시내티), 김선우(콜로라도), 김병현(콜로라도) 등 해외파들이 포진했다. 또 두산 김동주, 보스턴 최희섭, 요미우리 이승엽까지 한·미·일 프로야구를 아우르는 4번타자들이 버텼다. 반면 2009년 대표팀은 구성단계부터 난항을 겪었다. 부동의 해결사였던 김동주와 이승엽이 한꺼번에 빠졌고, 내야의 기둥 박진만(삼성)도 전지훈련지까지 왔다가 부상으로 끝내 하차했다. 해외파의 경험을 고려해 김병현을 불렀지만, 여권 분실 사고로 승선하지 못했다.
또 유일한 메이저리거인 추신수의 소속팀 클리블랜드는 까다로운 차출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출발이 힘겨웠던 2009년 대표팀은 4강을 넘어 결승까지 진출하면서 첫 대회보다 더 좋은 성과를 얻었다. 선수들의 힘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또 한 번의 기적이 탄생한 것이다.
KIA 윤석민과 LG 봉중근이 눈부신 호투와 함께 대표팀 마운드의 기둥으로 우뚝 섰고, 김태균(한화)과 추신수가 김동주-이승엽을 능가하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대표팀 탈락 위기에서 벗어난 최정(SK)과 이범호(한화)의 맹활약도 빛났다. 눈앞의 절망이 언제든 새로운 희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대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