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퀸스파크레인저스(QPR)의 박지성은 자주 ‘소리 없는 영웅’이라고 불렸다. 화려하진 않지만 궂은일을 마다 않는 경기 스타일 때문이다. 배구 코트에도 이 같은 소리 없는 영웅들이 있다. 좌우 쌍포에 가려 주목받지 못하는 ‘수비형 레프트’들이다. 이들의 공격 점유율은 10% 안팎에 불과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활약은 그 이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시즌 개막 전 남자 프로배구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의 가장 큰 고민은 레프트 석진욱(36)의 활용법이었다. 체력 문제 때문에 노장 석진욱을 코트에 오래 세워둘 수 없었다. 최근 신 감독은 해답을 찾았다. KEPCO에서 데려온 최귀엽을 선발로 출전시켜 석진욱의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높은 공격성공률(68%)을 보이고 있는 최귀엽이 공격에 나서다가도 결정적인 수비가 필요한 승부처에서는 다시 수비가 뛰어난 석진욱이 나선다. 홍익대 신진식 감독은 “삼성화재가 무서운 이유는 끈끈한 조직력”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시즌까지 현대캐피탈의 아킬레스건은 수비였다. 그런 현대캐피탈의 팀 컬러를 바꾼 주인공은 이적생 임동규다. 그는 올 시즌 리시브 1위(세트당 5.7개)를 달리며 팀의 살림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리시브 성공률(62.7%)은 ‘월드 리베로’ 여오현(삼성화재·59.1%)보다 뛰어나다. 현대캐피탈의 가스파리니-문성민 쌍포는 안정적인 리시브에서 출발한 ‘택배 토스’ 덕에 마음 놓고 공격에 전념할 수 있다. 신진식 감독은 “최근 힘이 좋은 외국인 선수가 늘어나고 강한 서브가 유행하면서 수비형 레프트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3강’(삼성화재 현대캐피탈 대한항공) 가운데 시즌 후반기를 가장 기대하고 있는 팀은 대한항공이다. 개막 전 발목 부상으로 재활에 전념하던 ‘수비형 레프트의 정석’ 곽승석이 복귀했기 때문이다. 곽승석은 지난 시즌 세트당 5.8개의 리시브를 기록하며 이 부문 1위에 올랐다. 각 팀 리베로를 제치고 수비 종합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대한항공 신영철 감독은 “살림꾼 곽승석이 제 역할을 해 줘야 우리 팀이 살아난다”고 말했다.
프로배구 정규리그가 반환점을 향해가는 가운데 소리 없는 영웅들의 활약에 따라 각 팀의 희비가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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