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들어 수원은 축구의 도시로 굳어졌다. 하지만 1990년대 수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축구장과 야구장 풍경은 별개가 아니었다. 수원에서 나고 자란 야구팬 장선영 씨(31·여)는 “프로축구 경기가 열리던 (수원) 공설운동장에 각 학교 체육복이 응원복처럼 등장했던 것도 예삿일이었지만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야구장에 드물게 찾아오는 야구 경기도 놓칠 수 없던 ‘레어 아이템’이었다”며 “물론 축구팀은 ‘살가운 내 새끼’, 야구팀은 ‘인천에서 찾아온 손님’이었던 느낌이 없었던 아니다”고 말했다. 장 씨는 현대 유니콘스가 수원 구장을 쓰던 대학 시절 ‘배트 걸’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원 야구장은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지었다. 이듬해부터 프로야구 팀에서 보조 구장으로 사용하면서 한 시즌에 10경기 안팎이 열렸다. 1999년에는 4개 보조 구장 중에서는 처음으로 프로야구 올스타전도 열었다.
손님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2000년 1월 2일 한 스포츠 신문 1면에 ‘현대 연고지 서울로 이전’이라는 기사가 실렸던 것. 발단은 쌍방울 사태였다. 모기업 사정으로 전북을 연고로 하던 쌍방울 레이더스가 공중분해 됐다. 대신 SK그룹에서 창단 형식을 빌려 야구팀을 인수하는 방안이 물밑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SK그룹은 야구단 인수 조건으로 연고지 수도권 이전을 원했고, 한국야구위원회(KBO)는 SK그룹 창업지인 수원을 추천했다. SK는 “다른 팀은 광역 연고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만 도시 하나를 준다는 건 차별”이라고 반대했다. 연고지 일부를 넘겨야 하는 현대도 “그러면 우리는 차라리 서울로 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결국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둔 3월 15일 SK는 인천 도원구장, 현대는 서울에 경기장을 확보하는 2001년 후반기까지 수원구장을 쓰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최용준 씨(33)는 “그 전까지는 야구장을 열심히 찾던 친구들도 현대가 ‘어차피 떠날 손님’으로 찾아온다는 소식에 시큰둥했다”고 회상하며 “수원은 토박이가 상당히 많은 편이라 고향에 대한 자부심도 센 편”이라고 말했다. 2000년 인구 통계 총조사에 따르면 당시 수원시는 도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94만여 명)였다. 수원 출신 인구 비율은 44.7%. 경기도 시(市)급 지자체 중 수원보다 토박이 비율이 높은 도시는 없었다. 역시 수원 토박이인 김용서 당시 시장은 “수원으로 연고지가 확정될 경우에만 구장 시설을 개선하겠다”고 말했고, 이 말에 수원 야구팬 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2002 한·일 월드컵을 맞아 수원에 최신식 축구장이 들어섰다. 수원 야구장은 매해 관중 동원 꼴찌였다.
수원에 미련이 없기는 현대도 마찬가지. 현대는 2001년 문학구장 준공을 앞두고 인천시에 SK와 함께 구장을 공동 사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는 거절이었다. 현대가 수원에 눌러 앉았던 유일한 이유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 목동구장은 보수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새로 구장을 짓겠다던 꿈은 현대그룹 상속권을 둘러싼 ‘왕자의 난’을 거치며 물거품이 됐다. 결국 현대는 2007년 해체될 때까지 수원을 떠나지 못했다.
요즘 수원 풍경은 상전벽해 그 차제다. 주인 없는 야구장엔 이미 최신식 전광판이 들어선 지 오래. 수원시는 현재 1만5000석 규모인 야구장을 2만5000석으로 늘리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전광판도 업그레이드 한다. ‘인덕원-수원 복선전철’ 노선 중 장안구청 사거리 역사 이름도 ‘수원 야구장역’으로 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상태다.
1990년대 학창시절을 보냈던 이들은 어느덧 자기 아이 손을 잡고 야구장을 찾을 나이가 됐다. ‘유니콘스의 유목민 팬’을 자처하는 신홍균 씨(32)는 “경기도 야구팬들도 이제는 우리도 손님이 아니라 ‘내 새끼’를 맞이할 준비가 됐다는 자세로 제10구단 발표를 기다리는 분위기”라며 “내 아이들에게는 인천, 목동 등지를 멀리 오가는 번거로움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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