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009시즌 프로배구 신인 드래프트. 기대하지 않았던 1차 2순위 지명권을 쥔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은 주저하지 않고 유광우를 선택했다. “공격수는 만들어지지만 세터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인창고 시절 5관왕, 인하대 시절 2년간 9관왕을 달성한 주전 세터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생에 붉은 카펫이 깔리는 듯 했다. 2007년 12월 단 하루 삼성화재에서 훈련을 한 뒤 사달이 났다. 오른발이 퉁퉁 부었다. 대학에서 무리했던 결과였다. 재활과 수술의 기로에서 수술을 선택했다. 그 뒤 2년 반 코트에 서지 못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씩 신경 영양 주사를 진통제와 함께 맞는다. 링거로 3시간씩이나 걸린다. 독한 약이다. 흐린 날이면 약물의 효과도 사라진다. 평생 오른발 통증을 친구삼아 살아가야 한다. 그래도 배구를 버리지 않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늘로 찌르고 저리는 아픔이 찾아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통증과 정면으로 싸웠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인내를 실감한 재활의 힘든 시간도 견뎌냈다. 아쉬웠기에 이겨내고 코트로 돌아왔다. 스포츠의 본질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2012∼2013시즌 V리그 우승과 세터상은 용감한 유광우(28)에게 주는 훈장이었다.
대학때 무리…신인 첫 훈련부터 발에 통증이 수술→재활→재수술→재활 2년6개월만에 복귀 갑자기 찾아온 주전 찬스때도 이 악물고 뛰어
팀플레이 배구…세터 제 1덕목은 헌신·믿음 시즌 내내 오른발 통증…진통제 맞아가며 토스 통합챔프+세터상 훈장에도 “아직 V가 고프다”
○시간을 되돌려도 다시 수술할 것이다
2007년 12월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고 첫 훈련을 한 뒤 발에 탈이 났다.
신 감독은 재활을 권유했다. “어떤 감독도 선수에게 수술을 권유하지 않는다. 선수의 인생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고 신 감독은 기억했다. 그러나 유광우는 수술을 택했다. “수술하면 얼른 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빨리 팀에 보탬이 되어야한다고, 그것이 선수의 의무라 믿었다.”
병원에서는 3개월이면 충분하다고 장담했다. 오른발 안쪽과 바깥쪽 복사뼈 아래의 손상된 인대를 접합하는 수술이었다. 3시간 정도 걸렸다. 며칠 뒤 퇴원했다. 문제가 생겼다. 한달 뒤였다. 발에 감각이 없었다. 통증만 있었다.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재활을 겸하면서 지내는데 상태가 더욱 나빠졌다. 뒤꿈치를 못 디딜 정도였다. 2008년 10월까지 무려 10개월을 입원해서 지내야 했다. 의료 사고였다. 급히 다른 병원을 알아봤다. 모두들 손을 내저었다. 어렵다고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나온 방법이 독일행이었다.
레버쿠젠으로 떠났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서였다. 그때 운동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내가 끝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프로에 와서 단 한경기도 뛰어보지 못하고 이렇게 되면 아쉽다는 생각뿐이었다. 통증이 워낙 심해서 배구를 못하게 됐을 경우를 생각할 틈도 없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잘못된 수술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좋아질 것이라고 위로를 시킨 뒤 나중에야 사실을 털어놓았다. 배구선수 출신의 부모는 도리어 아들을 안심시켰다. 덤덤하게 독일행 비행기를 탔다. 재수술과 재활에 5개월이 걸렸다. 비록 예전의 발은 아니지만 그래도 희망을 봤다. “지금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수술을 택할 것이다.”
○재활 인내를 배우다
1년 반의 재활은 인내와 긍정적인 생각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무조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독일까지 가서 혼자 수술을 받고 왔는데, 마지막 단계를 넘기면 되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악물고 했다.” 힘들 때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이라는 단어였다. “가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이 들면 재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그래서 ‘언젠가는 될 것이다’는 믿음만 머리에 넣었다. 그 마음을 먹기까지가 정말 힘들었다.”
신 감독은 기다렸다. 최태웅이라는 주전 세터가 버티고 있었기도 했지만 유광우가 가진 가능성이 컸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수술이 잘못되자 병원과 담판을 지어 재수술 비용과 독일에서의 재활비용까지 부담하게 만든 감독이었다. “어지간한 선수라면 나도 포기했을 것이다. 아마시절 해왔던 기대치가 있었기에 기다렸다.”
2009∼2010시즌부터 팀에 합류했다. 최태웅의 보조세터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유광우가 화제가 된 것은 챔피언결정전 7차전 때였다. 현대캐피탈과 3승3패를 이룬 뒤 맞이한 7차전 5세트 때였다. 감독은 운명의 세트에 유광우를 선발로 투입했다.
“선발은 아니어도 혹시 한 번은 투입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먼저 들어갔지만 의외로 긴장은 되지 않았다. 그냥 ‘먼저 하는구나‘라는 생각뿐이었다.”
그 때 신 감독은 유광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격수가 때리기 좋게 올려라.” 그 때나 지금이나 감독의 지시는 비슷하다. 세터가 무엇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헌신을 요구했다. 유광우는 그대로 했다. 삼성화재가 극적으로 우승했다. 모든 선수들이 경기 뒤 감독의 판단에 깜짝 놀랐다고 털어놓았던 운명의 선택이었다.
○어느 날 삼성화재의 주전세터가 되다
운명의 선택은 또 나왔다. 그해 삼성화재는 현대캐피탈에서 FA선수로 박철우를 영입했다. V리그 최초의 FA선수 영입. 당시 규정대로라면 삼성화재는 박철우를 포함해 3명을 제외한 모든 선수를 내놓아야 했다. 현대캐피탈 김호철 감독은 뜻밖에 베테랑 최태웅을 데려갔다. “그 소식을 듣고 내게 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물론 부담은 더 컸다. 그동안 최태웅 선배와 팀이 일궈온 우승기록을 이어가야 한다는 부담, 내가 잘못하면 그 기록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부담감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다행히 선참들이 유광우를 도와줬다. 큰 의지가 되고 힘이 됐다. “너 혼자 하지 마라. 게임을 져도 너 때문에 진 것이 아니고 삼성화재가 진 것이다. 실망하지도 부담을 갖지도 말라.”
유광우도 화답했다. “그동안 혼자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많았지만 이번 시즌에는 군에서 복귀한 강민웅과 나눠 하면서 부담이 적어졌다. 편하다. 챔피언결정전 때는 시즌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했다. 지난 시즌 서두르다 실패한 경험이 있어 더욱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결혼을 생각할 나이도 됐지만 아직은 자신이 떠맡은 일이 먼저다. “선수는 모두 우승에 대한 욕심이 있다. 얼마나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에 당분간은 그것에 전념할 것이다. 내가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지금 배구만 생각해도 벅차다.”
○유광우에게 세터란
축구선수로 시작해 배구를 선택했다. 인창중 2학년 때 세터가 됐다. 17번의 우승을 경험한 그에게 세터의 덕목을 물었다. “헌신과 믿음”이라고 대답했다. “축구 농구는 혼자 훈련이 가능하지만 배구는 다르다. 누군가 한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 배구가 된다. 그 선수가 받쳐주고 올려줘야 때린다. 이것이 헌신이다. 내가 공을 올려주면 공격수가 반드시 성공시킬 것이다. 수비수가 잘 받아서 내게 좋은 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