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게 우승 못해…美 프로스포츠 최장 2003년 NL 챔피언시리즈 6차전 저주의 부활 WS행 직전 파울공에 손댄 바트먼 공공의 적 에이스 프라이어는 평점심 잃고 역전패 눈물 저주 타파 온갖 노력 불구 올해 전망도 어두워
시카고 컵스가 월드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우승한 때는 1909년이다. 미국 프로스포츠를 통틀어서도 가장 긴 우승 가뭄이다. 이를 두고 많은 컵스 팬들은 ‘염소의 저주’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게다가 보스턴 레드삭스가 ‘밤비노의 저주’를 푼 뒤로는 컵스 팬들의 조바심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1908년과 1909년 월드시리즈를 2연패한 컵스는 이후에도 1945년까지 7번이나 내셔널리그 정상을 밟았지만 월드시리즈 우승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1945년 10월 15일 컵스의 광적인 팬 빌리 사이아니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애완 염소 빌리를 데리고 리글리필드를 찾았다. 염소에게서 나는 악취 때문에 입장을 거부당한 사이아니스는 “컵스가 이번 시리즈에서 패배를 당할 것이고, 다시는 월드시리즈에 진출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벌어진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컵스가 패해 시리즈는 원점으로 돌아갔고, 결국 3승4패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우승 트로피를 내주고 말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1945년 이후 컵스는 정말 저주에 걸린 듯 단 한 차례도 월드시리즈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되살아난 ‘염소의 저주’
한동안 잠잠했던 ‘염소의 저주’가 수면 위로 재부상한 때는 2003년이다. 10월 15일 리글리필드에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6차전이 열렸다. 시리즈 전적 3승2패로 앞서던 홈팀 컵스는 3-0으로 리드한 8회초 1사 2루, 월드시리즈 진출까지 아웃카운트 5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마운드에는 정규시즌 18승의 마크 프라이어가 버티고 있던 터라 컵스 팬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염소의 저주’가 되살아났다. 플로리다 말린스 2번타자 루이스 카스티요의 타구가 높이 떠 좌측 파울지역으로 향했다. 볼을 쫓아 달려간 컵스 좌익수 모이세스 알루가 파울지역 펜스에 기대며 점프했지만, 한 팬의 손에 맞고 굴절된 볼은 관중석으로 떨어져 파울로 처리됐다. 팬의 방해만 없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다고 판단한 알루는 글러브를 내동댕이치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빅리그 2년차였던 프라이어는 평정심을 잃고 갑자기 제구 난조를 보이며 카스티요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이어 이반 로드리게스를 상대로 0B-2S의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성급하게 승부를 걸었다가 적시타를 허용해 3-1로 쫓겼다. 그러나 더스티 베이커 컵스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프라이어의 구위를 믿었기 때문이다. 프라이어는 4번타자 미겔 카브레라를 유격수 땅볼로 유도했다. 충분히 병살로 연결해 이닝을 끝낼 수 있었지만, 유격수 알렉스 곤살레스가 어이없는 실책을 범했다. 결국 데릭 리에게 동점 2루타를 허용한 뒤 프라이어는 강판됐다. 기세가 오른 말린스는 제프 코나인의 희생플라이로 역전에 성공했고, 마이크 모데카이의 주자 일소 2루타와 후안 피에르의 적시타로 순식간에 전세를 8-3으로 뒤집었다. 7차전에서도 말린스는 케리 우드를 내세운 컵스를 상대로 3-5로 뒤지던 경기를 9-6으로 뒤엎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말린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를 4승2패로 제압해 구단 역사상 첫 우승을 달성했다.
○저주가 뭐길래!
승부의 분수령이 된 6차전에서 알루의 수비를 방해한 컵스 팬 스티브 바트먼은 졸지에 공공의 적이 됐다. 안전요원과 경찰의 호위 속에 리글리필드를 빠져나가던 그를 향해 팬들은 맥주 세례와 온갖 쓰레기, 욕설을 퍼부었다. 심지어 그의 신상이 공개되자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도 끊이질 않았다. 시카고 경찰은 한동안 바트먼의 집을 철통같이 지켜야 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친동생인 젭 부시 주지사가 바트먼에게 플로리다주에 집을 마련해주겠다고 제의할 정도로 큰 이슈가 된 사건이었다. 만약 컵스가 6차전을 잡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면 ‘바트먼 사건’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컵스 팬들은 1969년에도 ‘염소의 저주’에 희생양이 됐다고 믿고 있다. 후반기 한때 컵스는 17.5경기차로 크게 리드를 해 월드시리즈 진출은 떼어 놓은 당상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9월 10일 뉴욕 메츠와 원정경기를 치르던 도중 기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셰이스타디움에 갑자기 나타난 검은 고양이가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그 경기에서 패한 컵스는 시즌 막판까지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월드시리즈 진출 티켓을 메츠에 넘겨주고 말았다. 메츠 또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4승1패로 누르고 팀 역사상 첫 월드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저주는 언제쯤 풀릴까?
그동안 ‘염소의 저주’를 풀기 위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저주의 당사자 빌리 사이니어스의 친조카 샘은 여러 차례 염소를 대동하고 리글리필드를 찾았다. 개막전에 염소가 등장한 1984년과 1989년 모두 컵스는 지구 우승을 거머쥐었다. 심지어는 저주를 다른 팀에 떠넘기려는 시도도 있었다. 2003년 일부 컵스 팬들은 지구 라이벌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홈구장인 미닛메이드파크에 염소와 함께 입장하려고 했다. 당연히 거부당할 것으로 알고 한 고의적 행동으로 ‘염소의 저주’를 애스트로스에 넘겨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벌어진 ‘바트먼 사건’으로 인해 이들의 시도는 결국 무위로 돌아간 꼴이 됐다. 2012년 2월 26일 스스로를 ‘저주 타파의 선봉장’이라고 일컬은 5명의 팬들이 리글리라는 이름의 염소와 함께 컵스의 스프링캠프가 차려진 애리조나주 메사에서 시카고 리글리필드까지 1739마일(약 2800km)을 걸어가는 일도 벌어졌다. 이들의 간절한 염원과는 달리 컵스는 지난해 61승에 그쳐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29위에 머물렀다. 올 시즌 전망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
○저주에 희생된 영건들
2003년은 ‘염소의 저주’를 깰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로 여겨진다. 예기치 않은 ‘바트먼 사건’에 발목을 잡혔지만 우드와 프라이어로 이어지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원투펀치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지휘봉을 잡았던 베이커 감독은 두 신예투수를 혹사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프라이어는 2003년 211.1이닝이나 던졌는데 정규시즌 경기당 평균 투구수가 113.4개에 달했다. 특히 9월에는 무려 평균 126구를 던졌고, 포스트시즌에서도 120구나 됐다. 우드도 마찬가지로 정규시즌 211이닝을 던져 2년 연속 200이닝을 돌파했다.
‘컵스의 미래’로 불리던 우드와 프라이어는 2003년을 정점으로 나란히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잦은 부상이 원인이었다. 우드는 2008년 34세이브를 올리며 반짝했지만, 86승53패63세이브의 통산성적을 남기고 지난해 은퇴했다. 어깨와 팔꿈치 부상에 시달린 프라이어는 2006년을 끝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아예 종적을 감췄다. 이제 32세인 프라이어는 추신수가 속해있는 신시내티 레즈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하고 빅리그 복귀를 노리고 있는데, 그에게 빚(?)이 있는 베이커 감독이 얼마나 배려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최소 10년은 컵스의 마운드를 짊어질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우드와 프라이어는 어쩌면 또 다른 ‘염소의 저주’의 희생양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