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피플] “사랑한다 말할 걸…” 조웅천의 사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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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11일 07시 00분


SK 조웅천 코치는 선수시절 최고의 불펜투수였다. 그의 성장은 고인이 된 아버지의 극진한 정성이 큰 원동력이었다. 작은사진은 지난 연말 SK 조웅천 코치가 임종을 앞둔 아버지와 함께 땅끝마을 해남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 사진. 어머니 이성례 씨(왼쪽), 부친 고(故) 조태환 씨(오른쪽). 사진제공|SK 조웅천 코치
SK 조웅천 코치는 선수시절 최고의 불펜투수였다. 그의 성장은 고인이 된 아버지의 극진한 정성이 큰 원동력이었다. 작은사진은 지난 연말 SK 조웅천 코치가 임종을 앞둔 아버지와 함께 땅끝마을 해남으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 사진. 어머니 이성례 씨(왼쪽), 부친 고(故) 조태환 씨(오른쪽). 사진제공|SK 조웅천 코치
■ 조웅천 SK불펜코치, 부치지 못한 카네이션

새벽 펑고에 보약까지…날 키운 인생의 스승
잘 되면 네 덕 안되면 내 탓…아버진 그랬다
1월 폐암으로 세상떠나기 전까지 아들 응원

농구의 길 선택한 아들에게 똑같이 전한 말
후회 안할 자신있냐? 사랑의 대물림 시작됐다

“살아계셨다면 카네이션이라도 달아드릴 텐데….”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7일 문학구장. SK 조웅천(42) 불펜코치는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 코치의 아버지 故 조태환 씨는 1월 17일 향년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처음 맞는 어버이날…. 조 코치는 자신의 영원한 스승인 아버지를 눈물로 추억했다. “매일매일 통화하던 아버지를 잃으니 지금도 마음 가눌 곳이 없네요. 안부를 여쭙는데 큰 수고가 필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지금도 후배들에게 그런 말을 자주 전해요. 부모님 생전에 더 많이 찾아뵙고 연락드리라고요. 저는 ‘사랑 한다’는 말과 함께 꼭 안아드리지 못한 게 지금까지도 후회스럽습니다.”

○아버지라고 쓰고 그림자라고 읽는다

아버지는 중학교 때까지 축구선수였다. 하지만 운동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광주에서 고속버스 운전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어느 날, 초등학생 맏아들이 “야구를 하고 싶다”고 하자, 아버지는 불쑥 이렇게 되물었다. “운동하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누구보다 성실했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전철을 밟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도 조 코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장거리 운전으로 출장을 갈 때면, 몰래 배트와 글러브를 잡았다. 부모 이기는 자식은 없었다. “너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나중에 아버지를 원망하지 마라.”

그 길로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야구규칙 서적을 탐독하며 해박한 야구 지식을 갖췄고, 아들의 훈련도우미까지 자청했다. 조 코치는 학창시절, 야구부 장비 창고 열쇠를 항상 챙겨야 했다. 새벽 6시가 되면, 아버지와 함께 야구장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펑고를 쳐주는 것은 물론이고, 티배팅까지 올려줬다. 나태해질 때마다 아버지의 열정이 어린 조웅천을 깨웠다.

○지성이면 감천, 최고의 불펜투수를 키운 아버지

하지만 순탄한 야구인생은 아니었다. 학창시절에는 작은 키가 문제였다. 중3 때 158cm. 광주상고 진학하는 시점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야구를 그만둘 위기에 처했다. “너 야구시작 한 것,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지금부터 공부해서 대학갈 수 있겠냐?” 아버지는 실의에 빠진 아들을 다그쳤다. 그리고 어렵사리 순천상고 야구부에 아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쑥쑥’ 키가 컸다. 1년 동안 15cm나 자랐다. 조 코치는 “전세방을 전전하면서도 아들 보약만큼은 꼭 챙기셨다. 아버지의 지성 덕에,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했다.

1989년 태평양에 연습생으로 입단해 이듬해 정식선수가 됐다. 이후에도 5년의 세월을 2군에서 주로 보냈지만, 아버지의 뒷바라지에 보답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1995년 6월15일 수원 삼성전에서 거둔 프로 첫 승. 그의 소감은 “아버지에게 이 승리를 바친다”는 것이었다. 2000년 한국시리즈 때였다. 현대는 조웅천의 활약 속에 두산에게 1·2·3차전을 승리했다. 아버지는 감격의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 광주에서 올라왔다. 하지만 4·5·6차전에서 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조)웅천아, 내가 있어서 안 되나보다.” 아버지는 예매했던 7차전 표를 뒤로하고,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결국 현대는 그해 우승을 차지했다. ‘잘 되면 아들 덕분, 안 되면 내 탓….’ 아버지는 항상 그런 존재였다.

○불혹을 넘긴 아들의 부치지 못한 카네이션…

20시즌의 프로생활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조 코치는 또 하나의 큰 이별을 준비하게 된다. 은퇴기로에 있던 2009년 6월,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았다. 극진한 간호와 병원관계자들의 도움으로 2년 넘는 시간을 버텼지만, 올 1월 결국 바라지 않던 시간이 왔다. “중환자실에 계시면서도, 마지막 힘을 내시더라고요. 떠나시기 일주일 전에 병실을 찾아갔더니, 저를 꼭 안으시면서….” 넉 달 전을 회상하던 조 코치는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도저히 입 밖으로 그 말씀을 못 전하겠다”며 기자 앞에서 조용히 펜과 메모지를 들었다. “(조)웅천아, 너 못보고 죽는 줄 알았다.” 마지막 부정(父情)을 전한 아버지는 “이제 (조)웅천이는 스프링캠프로 보내라”며 연신 야구 코치 아들만을 생각했다.

영원한 스승이었던 아버지는 이제 그의 곁에 없지만, 조 코치는 또 누군가의 멘토가 됐다. 얼마 전, 그의 중학생 아들 승원(14) 군은 농구선수의 길을 택했다. 조 코치는 조용히 아들을 불렀다. “너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나중에 아버지 원망하지 마라.” 30년 전, 자신이 똑같이 들었던 그 말이었다. 이제는 부칠 수 없는 카네이션…. 하지만 아버지의 큰 그림자는 그렇게 불혹을 넘긴 아들에게 남았다. 조 코치는 “다음주 광주 원정(14∼16일) 때는, 전남 화순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꼭 찾아가봐야겠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문학|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트위터@setupma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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