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까맣게 그을린 종아리와 대조적으로 빛나던 하얀 발. 열 살짜리 여자 아이는 TV 화면을 통해 본 그 발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1998년 7월 7일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US오픈 18홀 연장 라운드. 당시 21세의 박세리(36·KDB금융그룹)는 18번홀에서 연못 턱에 걸린 공을 치기 위해 양말을 벗어던지고 물에 들어가 샷을 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맨발 투혼’이다. 박세리는 그 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TV는 몇날 며칠 그 장면을 반복해 보여줬다. 볼 때마다 신기한 장면에 열 살 소녀는 넋을 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도 한번 해볼까. 박인비(25·KB금융그룹)는 그렇게 ‘골프 소녀’가 됐다. 당시 골프를 좋아하던 박인비의 아버지 박건규 씨는 몇 달 전부터 딸에게 골프를 권유하고 있었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딸은 박세리의 ‘맨발 투혼’을 보고선 스스로 골프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2013년. 한때 박세리가 평정했던 LPGA는 이제 박인비 천하가 됐다. 여자 골프 세계랭킹 1위 박인비는 10일 미국 뉴욕 주 피츠퍼드 로커스트힐 골프장(파72·6534야드)에서 열린 시즌 두 번째 메이저대회 웨그먼스 LPGA 챔피언십 최종 라운드에서 연장 접전 끝에 캐트리오나 매슈(스코틀랜드)를 꺾고 우승했다. 4라운드까지 5언더파 283타로 매슈와 동타를 이룬 박인비는 연장 3번째 홀에서 6m 버디 퍼팅을 낚으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박인비는 4월 열린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을 포함해 이번 시즌 두 차례 열린 메이저대회 우승컵을 모두 가져갔다. 2008년 US오픈을 포함하면 개인 통산 3번째 메이저대회 우승. 박인비는 또 이번 시즌에만 4승을 올리며 세계랭킹은 물론이고 상금(122만1827달러)과 올해의 선수 포인트에서도 1위 자리를 굳게 지켰다.
현재 페이스라면 ‘우상’ 박세리도 뛰어넘을 수 있다. LPGA에서 통산 25승을 올린 박세리는 메이저대회를 5차례 제패했지만 아직 나비스코 대회에서는 우승하지 못했다. 반면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고 있는 박인비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눈앞에 두고 있다. LPGA에 따르면 박인비는 브리티시여자오픈이나 올해부터 메이저 대회로 승격한 에비앙 마스터스 중 한 대회에서 우승하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또 박세리가 보유하고 있는 한국인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인 5승(2001년, 2002년)에도 1승 차로 다가섰다. 박인비는 시즌 전체 일정의 절반가량인 13개 대회 만에 4승을 올려 남은 대회에서 2승만 추가하면 된다. 올해 목표로 삼았던 ‘올해의 선수상’ 수상도 유력하다. 이날까지 191점을 얻어 2위 수잔 페테르센(87점)을 100점 차 이상 앞서고 있다. 박세리를 포함해 한국 선수 가운데 LPGA투어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선수는 없다.
박인비는 “어릴 때 우상으로 생각하던 박세리 선배를 요즘 만나면 ‘내가 꿈을 이뤘구나’라는 뿌듯함을 느끼곤 한다”며 “선배님이 워낙 대단한 기록을 세웠기에 그걸 깨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다만 매 대회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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