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신발 산게 아까워서 골프 입문 레슨비 없어 아빠와 독학으로 습득 벙커샷·퍼팅 연습만으로 몸에 익혀 가장 기본기인 스윙도 나만의 방식
3주 연속 우승은 해야 진짜 내 실력 욕심 버리고 여유롭게 경기 임할 것
태극마크 한번 달아본 적 없고, 유망주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남들처럼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내 여자골프 1인자를 눈앞에 뒀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를 평정하고 있는 ‘독학골퍼’ 김보경(27·요진건설)의 얘기다.
김보경의 상승세가 돋보인다. 6월에만 E1 채리티 오픈과 롯데 칸타타 여자오픈에서 2주 연속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가장 먼저 2승 고지를 밟았다.
13일 제주 엘리시안 골프장에서 그를 만났다.
● 첫 승까지 4년, 이후 99전 100기
2004년 프로가 된 김보경은 2008년 5월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고교 4년 후배 최혜용을 꺾고 우승했다. 우승까지 꼬박 4년이 걸렸다.
2승을 하기까지 5년이 걸렸다. 99번의 침묵 끝에 100번째 경기에서 기다리던 두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얼떨떨했다. 우승했다는 실감을 하지 못했다. 축하 전화를 쉴 새 없이 받고 나서야 ‘우승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5년의 시간은 길었다. 우승의 기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성적이 곤두박질치면서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김보경은 “마지막 날이 되면 우승에 집착하게 되고 상대를 의식하면서 성적이 나빠졌다. 조급함이 우승의 걸림돌이 됐다”고 말했다.
두 번째 우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왔다.
“E1 채리티 오픈 마지막 날 경기에 나가면서 (김)효주 아니면 (이)정은이가 우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잘 쳐서 ‘톱5’에만 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전 같았으면 ‘우승해야 겠다’라는 생각에 더 잘 치려고 했을 텐데 그 대회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긴장도 되지 않았고, 떨리지도 않았다. 홀가분하게 경기를 했던 게 우승으로 연결됐다.”
5년 만의 우승으로 많은 걸 얻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경기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낸 게 가장 큰 소득이다.
● “장갑 산 게 아까워서 골프 배웠죠”
김보경의 골프 입문기는 특이하다. 골프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의 후배가 실내 골프연습장에 데려다 주면서 장갑과 신발을 사준 게 계기가 됐다.
“골프를 배울 마음이 없었다. 재미도 없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돈을 주고 산 장갑과 신발이 아까웠다. 그래서 1년만 배워보자는 생각이었다.”
김보경의 부모는 부산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 넉넉하지도 않았다. 멋모르고 시켰다.
“아빠가 골프를 전혀 몰랐다. 지금도 골프를 칠 줄 모르신다. 아마도 골프를 하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드는 걸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고생도 많이 했다.”
김보경은 중·고교 시절 전국 무대에서 우승한 적이 없다.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골프를 그만뒀을 수도 있다. 중·고등학교 때는 연습라운드 할 형편도 안 됐다. 연습라운드도 하지 않고 대회에 나갔던 적이 많았다.”
레슨을 받으며 골프를 배울 수도 없었다. 1년 간 실내 연습장에서 기본기를 배운 뒤부터는 아빠와 함께 독학을 했다. 모든 걸 스스로 찾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스윙도 엉터리다.
김보경은 “지금도 내 스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립을 잡는 것부터 방향을 설정하고 어드레스 하는 것까지 모두 나만의 방식대로 한다. 그렇지만 고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공을 똑바로 보낼 수 있으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스윙은 그렇다 치고 벙커 샷이나 퍼팅 같은 섬세한 부분을 터득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벙커 샷을 할 때는 공 뒤를 쳐야 한다는 방법만 알고 있었다. 그 다음은 연습 밖에 없었다. 하루 2∼3시간씩 연습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었다. 될 때까지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프로가 돼서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캐디피라도 아끼겠다는 마음에 아버지 김종원(57) 씨는 딸의 골프백을 멨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9년째 계속하고 있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세미프로테스트를 시작으로 프로테스트, 시드전을 한번에 통과했다.
김보경은 서희경, 홍란, 윤슬아와 함께 프로가 됐다. 입문했을 때만해도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우승은 가장 먼저 했다.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보경의 우승 이후 홍란, 서희경이 줄지어 우승에 성공했다. 그 뒤에는 김보경의 공이 컸다.
2008년 5월 두산 매치플레이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김보경은 그날 저녁 홍란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우승재킷을 입어보라고 빌려줬다. 그러자 3주 뒤 홍란이 KB국민은행 1차 대회에서 우승했다. 홍란은 우승재킷을 서희경에게 빌려줬다. 우승의 기운이 전해진 것일까. 서희경 역시 2개월 뒤 첫 우승을 신고했다.
● “3주 연속 우승해야 진짜 내 실력”
‘독학골퍼’ 김보경은 어느 한 가지 돋보이는 게 없다.
드라이브 샷 비거리는 평균 259.96야드로 전체 38위에 불과하다. 1위 장하나(21·277.50야드)와는 거의 20야드 이상 차가 난다. 아이언 샷은 그나마 조금 낫다. 68.83%로 11위에 올라 있다. 퍼팅 실력 역시 수준급과는 거리가 멀다. 라운드 당 퍼팅 수가 30.22개로 16위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집중력과 정신력이 성적을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상승세를 타고 있는 김보경이 14일 시작한 KLPGA 투어 에쓰오일 챔피언스에서 내친 김에 3주 연속 우승에 도전한다. 이번에도 전략은 ‘여유’다.
KLPGA 투어에서 3주 연속 우승은 2008년 서희경(27·하이트) 이후 맥이 끊겼다. 김보경이 이번 대회에서도 우승하면 5년 만에 기록을 작성하게 된다.
김보경은 “2주 연속 우승을 했지만 아직까지 내 실력이라고 믿지 않는다”면서 “3승을 하면 진짜 내 실력이라고 믿을 것 같다”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