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샴페인은 저절로 터지지 않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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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땀, 꿈, 그리고 사랑

요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는 한국의 준비된 ‘월드스타’들이 누비고 있다. 박세리의 활약을 보면서 골프에 입문한 ‘세리 
키즈’다. 2011년 US여자오픈 챔피언인 유소연은 올해 6차례나 톱10에 오르며 차세대 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고, 박인비는
 올 시즌에만 6승을 거둔 명실상부한 여자 골프계의 ‘여제’다. 최근 대회인 매뉴라이프 파이낸셜 클래식에서 우승한 박희영은 가장 
교과서적인 스윙을 하는 선수로 꼽힌다. 선의의 경쟁자이자 절친한 언니 동생 사이인 이들의 호쾌한 드라이버샷을 연속스윙으로 
구성했다. 하나금융그룹·던롭스포츠코리아 제공
요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는 한국의 준비된 ‘월드스타’들이 누비고 있다. 박세리의 활약을 보면서 골프에 입문한 ‘세리 키즈’다. 2011년 US여자오픈 챔피언인 유소연은 올해 6차례나 톱10에 오르며 차세대 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고, 박인비는 올 시즌에만 6승을 거둔 명실상부한 여자 골프계의 ‘여제’다. 최근 대회인 매뉴라이프 파이낸셜 클래식에서 우승한 박희영은 가장 교과서적인 스윙을 하는 선수로 꼽힌다. 선의의 경쟁자이자 절친한 언니 동생 사이인 이들의 호쾌한 드라이버샷을 연속스윙으로 구성했다. 하나금융그룹·던롭스포츠코리아 제공
“아침에 눈을 뜬 뒤 꿈이 아니어서 다행이었어요. 아직도 내가 해낸 일이 믿기지 않아요.”

1일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올 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대회 3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이룬 박인비(25·KB금융그룹). 그녀는 우승 이튿날인 2일 미국 NBC의 ‘투데이 쇼’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박인비는 올 시즌 꿈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38·미국)와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남자 골프의 우즈가 올 시즌 4승을 거두는 동안 박인비는 6승을 올렸다. 우즈는 올해 메이저대회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지만 박인비는 세 번이나 우승했다. LPGA 홈페이지는 1일 다음과 같은 말을 ‘오늘의 트윗’으로 선정했다. “타이거 우즈는 남자 골프계의 박인비다.”

‘대세’ 박인비에게는 ‘돈과 명예’가 뒤따른다. 박인비는 올해 상금으로 212만6529달러(약 23억8000만 원)를 벌어 들였다. LPGA 상금 랭킹 1위다. 이 밖에 세계랭킹, 최저타수상, 올해의 선수상 포인트 등에서도 모두 1위를 달리고 있다.

박인비가 이날 출연한 NBC의 ‘투데이 쇼’는 미국 전역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사회 저명인사나 인기인들이 주로 출연하는데 한국인으로는 지난해 ‘강남스타일’ 열풍을 일으킨 가수 싸이 이후 두 번째로 초청받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길거리를 걸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요즘은 가는 곳마다 사인 요청을 받는다. LPGA투어 마이크 완 커미셔너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인비의 그랜드슬램 도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투어의 열기가 뜨거워졌다. 전 세계 팬들과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LPGA투어 측은 ‘박인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박인비가 그랜드슬램에 도전하는 다음 달 1일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깜짝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앞서 박인비가 우승한 3대 메이저 대회 진품 트로피를 대회 장소인 영국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 가져가 주목도를 더욱 높이기로 했다.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박인비는 2011년부터 약혼자이자 스윙 코치인 남기협 씨(32)와 함께 투어를 다니고 있다. 경기 전후에는 쇼핑을 함께 하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으러 다닌다. 박인비에게 LPGA투어는 꿈과 사랑, 희망이 넘치는 무대다. 동료 선수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골퍼는 박인비와 같은 골프 인생을 꿈꾼다. 박인비가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의 ‘맨발 투혼’을 보고 LPGA 진출을 꿈꿨다면 요즘 모든 어린 골퍼는 박인비의 활약을 바라보면서 샷을 담금질하고 있다.

그렇다고 LPGA가 빛으로만 가득 찬 곳은 아니다. 세상 모든 곳이 다 그렇듯 성적에 따라 명암이 갈리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무대를 향한 선수들의 도전은 끊이지 않는다. 모든 한국 여성 골퍼들이 꿈꾸는 LPGA투어의 세계를 파헤쳐 봤다.
▼ 고단한 투어… 정신력 아무리 강해도 7,8년 하면 지쳐 ▼

멀고도 험한 길


매년 30∼40명의 한국 선수들이 LPGA를 무대로 활약하고, 또 종종 우승 소식을 전해오니 LPGA투어가 만만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LPGA투어에서 뛸 만한 선수가 탄생하기까지는 본인의 노력은 물론이고 가족의 지원이 필수다.

“옛날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집니다. 애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뒤 조의금과 보험금으로 1500만 원이 들어왔어요. 그 돈으로 골프를 계속 시킬 수 있었어요.” 신지애의 아버지 신제섭 씨의 말이다.

신지애는 중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여의었다. 신 씨는 당시 신지애에게 “엄마 목숨과 바꾼 돈으로 골프를 시킬 테니 지금보다 더 독하게 하라”고 말했다. 신지애는 “우리 집을 살리고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골프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연습에 더더욱 열중했다”고 했다.

골프는 돈이 많이 드는 종목이다. 유명 프로에게 배우려면 레슨비만 해도 한 달에 200만∼300만 원이다. 여기에 골프클럽과 공 등 장비, 의류, 연습 라운드 비용 등도 모두 본인이 내야 한다. 1년에 5000만 원 정도는 쉽게 깨진다. 국가대표가 되면 그나마 장비와 의류 등 협찬을 받을 수 있지만 정식 프로가 되어 돈을 벌기까지는 끊임없이 돈을 쏟아 부어야 한다.

신지애가 골프를 시작한 1990년 대 말만 해도 대다수 선수들이 열 살 전후에 골프를 시작했지만 요즘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골프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슈퍼루키’로 이름을 날리는 김효주(18·롯데)는 다섯 살 때부터 골프채를 잡았다.

연습도 지독하게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연습한다. 방학에는 외국으로 전지훈련도 간다. 한 레슨 프로는 “KLPGA에서 뛰는 선수들 중 ‘연습벌레’ 소리를 안 들은 선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을 넘어 LPGA까지 가는 선수들은 타고난 재능에 노력까지 열심히 한 선수”라고 했다.

LPGA 투어의 고단한 1년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LPGA투어에서 뛰는 선수들을 부러워하곤 한다. 세계에서 좋다는 골프장은 모두 찾아다니며 골프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돈을 내면서 골프를 치지만 선수들은 성적에 따라 거액의 상금을 받는다. 명예도 따라온다. 그렇지만 골프를 직업으로 하는 선수들에게 투어 생활은 고단한 일상이다. 한 대회의 공식 경기일은 대개 3, 4일이지만 연습일과 프로암대회까지 포함하면 꼬박 일주일을 같은 골프장에서 보내야 한다.

대회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대회 출전을 위해 이동하기 일쑤다. 짐을 풀고, 골프를 치고, 다시 짐을 싸서 이동하는 생활의 연속이다. 대부분의 골프장은 시골에 있다. 수십 kg짜리 골프백에 여행용 슈트케이스를 끌고 두세 번 비행기를 갈아타는 게 다반사다. 대회 일정도 빡빡하다. 2월 중순 시작한 올해 투어는 11월 말이 되어야 끝난다. 투어 사이사이 2, 3주씩 쉬는 기간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도 훈련을 해야 한다. LPGA투어에서 뛰는 한 선수는 “차라리 대회 기간이 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휴식기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샷을 가다듬느라 육체적으로 더 힘들다”고 말했다.

투어 일정이 모두 끝났다고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규시즌이 끝난 뒤에는 각종 이벤트 대회가 열린다. 참가 여부는 본인 의사에 달려 있을 때가 많지만 한일국가대항전과 같은 중요 대회에는 빠질 수가 없다. 스타 선수들은 또 후원사의 각종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최나연과 신지애 등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세마스포츠마케팅의 김길정 부장은 “이들이 한국에서 머무는 기간은 길어야 3주 정도다. 그나마 2주는 시즌 중 미뤄 뒀던 각종 행사 때문에 바쁘고 온전히 개인 시간을 보내는 것은 1주 정도다. 12월 말이나 1월 초가 되면 다음 시즌을 대비해 전지훈련을 떠난다”고 했다. LPGA 진출 1세대인 박지은은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선수라도 투어 생활을 7, 8년 하다 보면 지칠 수밖에 없다. LPGA 선수들의 수명이 짧은 것은 힘이 떨어져서라기보다는 피곤한 투어 생활을 버텨 나갈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랑이 꽃피는 LPGA

투어 생활에 힘들고 지친 선수들에게 남자친구는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올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박인비도 남자친구인 남기협 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게 골프계의 한결같은 평가다. US여자오픈에서 박인비에 이어 2위를 한 김인경은 “인비는 요즘 골프 안팎으로 행복해 보인다. 항상 가족, 친구와 함께하면서 여유를 갖는 게 좋은 플레이로 연결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말 네 살 연상의 사업가 김학수 씨와 결혼한 박지은은 “투어 진출 첫해인 2000년부터 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사랑을 키워 왔다. 투어 일정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도 가끔씩 주고받는 전화 한 통이 큰 의지가 됐다”고 말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다른 스포츠처럼 골프 선수들에게도 연애는 금기시됐다. 이성에 한눈을 팔다 보면 훈련과 경기에 방해가 된다는 뻔한 이유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연애는 물론 결혼 이후에도 투어 생활을 이어가는 선수들이 속속 생겨났다. 한희원(35·KB금융그룹)은 2003년 말 당시 프로야구 스타이던 손혁 씨(현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와 결혼했다. 역시 LPGA 진출 1세대인 김미현(36·은퇴)은 2008년 유도 스타 출신인 이원희 씨(용인대 교수)와 결혼했고, 2005년 브리티시여자오픈 우승자인 장정(33·볼빅)도 프로골퍼 출신인 이준식 씨와 오랜 연애 끝에 2011년 결혼에 골인했다. 한희원과 장정은 엄마 골퍼로 육아까지 병행하고 있다. 박세리도 8년째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다. 박세리는 지난해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결혼식 때 꼭 오셔서 많이 축하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LPGA투어에서 뛰는 한 선수는 “교제 사실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한국 선수들이 알게 모르게 연애를 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잘 치면 대박

LPGA투어는 세계 최고의 여자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다. 최고들의 경연장인 만큼 골프를 잘 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1인 기업’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한다. LPGA투어에서만 25승을 거둔 박세리는 상금으로만 1190만 달러(약 133억 원)를 벌었다. 최나연과 김미현은 800만 달러(약 90억 원)를 넘게 받았고, 박인비의 누적 상금액도 700만 달러(약 78억 원)가 넘는다.

상금 이외의 수입도 쏠쏠하다. 톱클래스 골퍼들은 대부분 메인 스폰서가 있다. 선수와 후원사의 계약 내용은 비공개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례적으로 금액이 발표된 적이 있다. 주인공은 신지애로 2009년 미래에셋과 5년간 최대 75억 원을 받는 계약을 했다.

계약 내용에는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도 포함된다. 업계에서는 대개 ‘5-3-2’ 법칙에 따라 보너스를 준다. 우승을 하면 상금액의 50%, 톱5에 들면 30%, 톱10에 들면 20%에 해당하는 보너스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계약에 따라 메이저대회 등 큰 대회에서 우승하거나 좋은 성적을 내면 별도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다.

한국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스폰서를 갖고 있는 선수는 최나연으로 일명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라고 불린다. 최나연의 옷과 모자에는 스폰서들의 로고가 가득하다. 최나연은 지난해 상금으로 198만 달러(약 22억2000만 원)를 받았는데 스폰서로부터 받은 금액은 이보다 훨씬 많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유명 선수들은 시즌이 끝나면 각종 이벤트 대회나 스폰서 기업의 행사에 초청을 받곤 하는데 이때 초청료가 장난이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선수는 “한창 잘나갈 때 금융계 회사의 VIP 모임에 초청 받은 적이 있다. 하루에 몇 개 홀을 함께 돌면서 레슨을 해줬는데 그때 1억 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선수는 “비시즌에 행사 몇 개만 뛰면 1년 치 상금을 금방 벌 수 있다”고 털어놓았다.
▼ “한 대회 참가경비 최소 330만원… 年3억 벌어야 본전” ▼

2001년 11월 제주 나인브릿지골프장에서 열린 CJ 나인브릿지 스킨스 게임에 출전한 박세리(오른쪽), 김미현(가운데), 박지은이 라운딩 도중 담소를 나누며 나란히 걷고 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 진출한 한국 선수 1세대인 이들은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한국 여자 골프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다. 박지은과 김미현이 지난해 은퇴하면서 현재 박세리만 투어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동아일보DB
2001년 11월 제주 나인브릿지골프장에서 열린 CJ 나인브릿지 스킨스 게임에 출전한 박세리(오른쪽), 김미현(가운데), 박지은이 라운딩 도중 담소를 나누며 나란히 걷고 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 진출한 한국 선수 1세대인 이들은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한국 여자 골프의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다. 박지은과 김미현이 지난해 은퇴하면서 현재 박세리만 투어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못 치면 쪽박

하지만 LPGA투어에서 뛰는 모든 선수가 큰 돈을 버는 건 아니다.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다니고 오성급 호텔을 이용하는 건 선택 받은 극소수다. 대부분의 선수는 힘들고 어렵게 투어 생활을 한다.

투어를 따라 다니는 데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많은 선수가 항공료를 아끼기 위해 야간에 출발하는 비행기나 몇 군데씩 경유하는 항공기를 이용한다. 그렇게 해도 500달러는 쉽게 나간다. 잠은 주로 모텔에서 자는데 일주일간 머무는 비용이 1000달러 정도 든다. 또 캐디를 고용하는 데 1200달러, 렌터카를 빌리는 데 500달러 정도가 들어간다. 대회마다 다르지만 경기 등록비도 200달러 안팎이다. 여기에 식사비와 간식비까지 더하면 대회당 최소 경비가 3000달러(약 336만 원)를 훌쩍 넘는다. 부모나 동반자가 있으면 비용은 2배, 3배로 불어난다. LPGA투어에서 뛰는 선수 대다수가 혼자 다니는 이유다. 골프 대디(Golf Daddy)들이 직접 캐디백을 메는 것도 경비를 아끼려는 생각 때문이다.

국내와 미국 무대를 오가며 활동한 정일미는 “미국 선수 가운데는 비시즌인 겨울 동안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를 하면서 투어 경비를 벌기도 한다. 몇몇 한국 후배는 성적이 좋지 않아 재산을 탕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 골프 선수의 부모는 “우승은 고사하고 예선 탈락만 안 해도 고맙다. 적은 상금이나마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숨지었다.

이 때문에 상금 랭킹 30위권이 아니면 돈 벌기가 힘들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 해에 최소 상금으로 30만 달러(약 3억4000만 원)는 벌어야 겨우 본전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이다.

유명 선수들이야 행사 한 번에 1억 원을 넘게 벌지만 그렇지 못한 선수들은 5000달러(약 560만 원)짜리 행사에 참가하기도 한다. 5000달러를 받아도 세금이 2000달러, 매니지먼트 비용이 1000달러 정도 빠져 나간다. 결국 손에 쥐는 돈은 2000달러 정도다.

박지은은 “한 대회에서 컷 탈락을 하면 다음 대회 장소로 이동하거나 집으로 가야 하지만 그냥 마지막 날까지 숙소에 머무는 선수가 꽤 있다. 미국에서는 갑자기 비행기 표를 바꾸면 변경 수수료가 더해져 티켓 값이 껑충 뛴다. 싫지만 돈을 아끼기 위해 남아 있는 것이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컷 탈락한 선수들끼리 한 방에서 모여 자기도 한다”고 했다. 취사 시설이 있는 호텔을 이용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달라진 ‘골프 대디’ 풍속도

한국 골퍼들에게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말이 골프 대디다. 실제로 LPGA투어에 진출한 선수 대다수는 골프 대디들의 열정과 헌신이 없었으면 미국 땅을 밟지 못했을 것이다.

박세리의 아버지 박준철 씨, 김미현의 아버지 김정길 씨, 박지은의 아버지 박수남 씨, 장정의 아버지 장석중 씨, 최나연의 아버지 최병호 씨, 지은희(27·한화)의 아버지 지영기 씨 등 골프 대디들은 딸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시즌 내내 딸을 따라 다니며 코치, 캐디, 운전사, 매니저, 요리사 등 다양한 역할을 해냈다. 이들 가운데는 노년에 접어들어 건강 문제로 병원 문턱을 자주 들락거리는 경우가 많다. 딸 걱정과 스트레스가 병을 부른 것이다.

골프 대디를 바라보는 시선은 극단으로 갈린다. 열정적인 부모의 모습이 좋은 쪽으로 부각되기도 했지만 극성맞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골프 대디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최운정(23)이나 이미향(20·이상 볼빅)의 경우처럼 아직도 딸의 캐디백을 직접 메는 아버지들도 있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1인 다역을 하는 부모는 크게 줄었다.

미국에서 ‘팀 볼빅’의 투어 매니저를 맡고 있는 양영의 씨는 “4, 5년 전만 해도 많은 부모가 선수들을 따라다녔다. 최근에는 부모가 투어를 함께 다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이제 갓 LPGA투어에 진출한 선수들은 부모가 동행하지만 몇 년 된 선수들은 대개 혼자서 다닌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는 부모가 하나부터 열까지 딸을 보살피려 했다면 요즘 부모들은 선수의 자율성을 인정해주는 풍토가 생긴 것 같다. 응원 차원에서 경기장을 찾는 경우는 있어도 예전처럼 극성맞은 행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박세리는 “요즘에는 미국 진출 후 적응하기까지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잘 갖춰졌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예전보다 자유분방해진 다 큰 딸들을 늘 컨트롤하기 힘든 분위기도 있다”고 진단했다.

실력은 기본, 외모는 덤

달라진 것은 아버지들만이 아니다. 선수들도 변했다. 박세리와 김미현, 박지은 등 1세대 선수들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어깨동무를 하고 웃었지만 카메라가 철수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박지은은 “요즘은 둘도 없는 언니 동생으로 친하게 지냈지만 한창 때는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 서로 아는 걸 얘기해주지 않고 혼자 코너에 가서 훈련을 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요즘은 다르다. LPGA투어에서 뛰는 한국 선수가 많아지면서 서로 의지하고 이끌어주곤 한다. 한 선수는 “부진한 선수들끼리 한 방에 모여 술도 한잔씩 마시곤 한다. ‘오늘 죽고 내일부터 잘하자’라며 스트레스를 털어버린다”고 했다.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최고의 경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 최나연은 2011년 한 해 동안 캐나다인 영어 교사인 그레고리 모리슨 씨(37)를 투어에 데리고 다녔다. 영어를 익혀 더 빨리 적응하고 싶어서였다. 최나연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요즘은 불편 없이 영어로 인터뷰를 한다. 최나연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게 된 뒤로 마음이 편해졌고 골프도 더 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모리슨 씨를 아예 로드 매니저로 고용한 최나연은 개인 트레이너인 변재겸 씨까지 3명이 한 팀을 이뤄 투어를 다닌다. 한때 한국 선수들의 영어 실력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지만 최근 LPGA투어 사무국은 한국 선수를 위한 통역 전담 직원을 없앴다. 그만큼 한국 선수들의 영어 실력이 향상됐다는 뜻이다.

신지애는 사촌오빠이자 트레이너인 신정훈 씨와 개인 캐디인 김정민 씨 등으로 팀을 꾸렸다. 비용은 혼자 다닐 때보다 2∼3배 많이 들지만 경기력에 도움이 되기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박인비는 매니지먼트 업체인 IB월드와이드의 관리 속에 스포츠 심리 전문 조수경 박사와 체력 담당 이문삼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는다.

요즘 선수들은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예쁜 얼굴이 자신의 가치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스폰서가 골프 실력이 좀 처져도 얼굴 예쁘고 몸매 좋은 선수들을 선호한다. 이 때문에 비시즌에 성형수술을 하는 선수도 많아졌다. 한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는 “LPGA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은 외국 선수들에 비해 화장을 짙게 하고 패션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월드스타를 향해

LPGA투어는 이제 더이상 미국 내의 스포츠가 아니다. 경기 침체와 인기 저하 속에서 LPGA투어는 세계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대회를 미국에서 열었지만 이제는 세계 각국을 돌며 투어를 개최한다. 새로운 골프 시장으로 떠오른 아시아 국가들이 그 중심에 있다. 아시아 국가들은 골프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데다 관광 산업에 도움이 된다는 등의 이유로 정부 차원에서 대회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LPGA투어 글로벌 마케팅 담당자는 “한국 선수들의 활약은 아시아 국가 골프 저변 확대에 기폭제가 되고 있다. 중국 등 아시아 3개국이 내년에 대회를 신설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일정 때문에 1개만 신설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올 시즌 LPGA투어는 28개 대회(총상금 4900만 달러·약 549억 원)로 일정이 짜여 있다. 그중 미국 현지에서 열리는 대회는 절반인 14개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 7개 대회를 개최한다. 미국에서는 대회가 줄어들고 외국에서는 신설되는 추세다.

올해 개막전은 2월 중순 호주에서 열렸다. 이후 태국과 싱가포르를 거쳐 3월이 되어서야 미국 본토에서 투어가 열리기 시작했다. 8월까지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에서 대회가 이어진 뒤 10월부터는 ‘아시아 투어’가 기다리고 있다. 올해 사상 처음으로 중국에서 대회가 열리고 말레이시아, 한국, 대만, 일본을 두루 거친다.

LPGA투어는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 있는 통로다. 오늘도 수많은 어린 선수들의 눈은 여자 골프 세계 최고의 무대, LPGA투어를 향하고 있다.
▼ 박인비 “내년 12월 결혼… 2세 계획은 태극마크 이후에” ▼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뛰는 동료 선수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박인비(오른쪽)-남기협 커플이 마라톤 클래식이 열리는 미국 오하이오 주 메도스GC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남 씨는 스윙 코치 자격으로 박인비의 투어에 동행하고 있다. 실베이니아=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뛰는 동료 선수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박인비(오른쪽)-남기협 커플이 마라톤 클래식이 열리는 미국 오하이오 주 메도스GC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다. 남 씨는 스윙 코치 자격으로 박인비의 투어에 동행하고 있다. 실베이니아=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어느새 5년이 흘렀다. 2008년 6월. 기자는 박인비(25)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 우승을 현장인 미네소타 주 에디나에서 지켜봤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만 19세였다. 박세리가 1998년 ‘맨발 투혼’으로 세운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20세 9개월)을 깨뜨린 것이다. 당시 기자는 5시간 가까이 이어진 마지막 라운드를 박인비의 어머니 김성자 씨와 함께 따라 다니며 유쾌한 10대의 반란을 목격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주요 언론들은 ‘PAK(박세리)을 대신해 PARK(박인비)의 시대가 열렸다’고 극찬했다.

이런 기대감은 금세 사라졌다. 이후 박인비는 LPGA투어에서 4년 넘게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하고 오랜 부진에 허덕였다. 골프를 포기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랬기에 올 시즌 박인비의 필드 여왕 등극은 극적이다.

골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가고 있는 박인비를 17일 LPGA투어 마라톤 클래식이 열리는 미 오하이오 주 실베이니아의 하이랜드 메도스GC에서 만나 단독 인터뷰했다.

서랍장 깊숙이 있던 2008년 US여자오픈 기념 티셔츠를 꺼내 입고 나타난 기자를 반갑게 맞은 박인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일 텐데 그녀는 “신문 방송 인터넷에 자주 등장하는 내 이름과 사진이 여전히 낯설다”고 어색해했다. 이 자리에는 ‘여왕의 남자’로 주목받으면서도 외부 노출을 꺼리던 박인비의 약혼자 남기협 씨(32)가 함께했다. 스윙 코치이기도 한 남 씨는 “인비와 24시간 붙어 다녔는데 요즘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행사와 인터뷰가 많아져서다”고 말했다. 웃고 떠드는 그들의 모습은 오하이오 대평원의 탁 트인 하늘만큼이나 밝았다. 박인비가 털어놓은 자신의 어제와 오늘을 일기 형식으로 풀어본다.

2013년 7월 14일

캐나다 토론토 인근의 워털루에서 끝난 매뉴라이프 파이낸셜LPGA클래식을 공동 14위(최종 합계 16언더파)로 마쳤다. 3연속 메이저 우승이자 최근 3개 대회에서 연속 우승한 뒤 출전했기에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웠다. 언론사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미국 기자들 취재에 응하기 위해 30분 넘게 수화기를 붙잡고 있다 보니 목과 팔까지 아팠다. 입술까지 부르텄다. 원래 난 은둔스타일인데…. 그러기에 얻은 ‘침묵의 암살자’라는 별명이 퍽 마음에 든다. 23일 한국으로 돌아가 잠시 머무는데 그때는 좀 쉴 수 있을까.

일정을 마친 뒤 오빠(남기협 씨)가 운전하는 렌터카를 타고 LPGA투어에서 뛰고 있는 친한 후배 소연(유소연)이와 국경을 넘어 미국 오하이오 주로 이동했다. 내 생일(7월 12일) 이틀 뒤인 오늘은 오빠와 내가 정한 ‘공식 연인 기념일’ 5주년이다.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 후 귀국해 오빠 고향인 경주로 내려가 자축한 날이었다. 그동안 100일, 1000일은 꼭 챙겼는데 오늘은 그만 까먹고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인 줄 아냐”는 말에 아차 싶었다. 너무 바쁘고 피곤했나 보다.

2013년 7월 1일

US여자오픈에서 다시 우승했다. 올해 메이저 3개 대회 연속 우승. 꿈인가 싶었다. 대회 전 오빠가 예상했던 스코어인 8언더파로 마무리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지난해와 올해 모두 샷 감각은 좋았다. 다만 작년에는 2위(준우승 6회)를 많이 했고 선두를 달리다 역전당하기도 했다. 올해는 다르다. 우승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긴장했을 때도 원하는 샷과 퍼팅이 나온다.

돈과 관련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올해 받은 상금(212만6529달러·약 23억8000만 원)은 세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내 뱅크오브아메리카 계좌에 쌓아두고 있다. 고교 시절을 보낸 라스베이거스에서 100만 달러짜리 집을 사는 데 쓰려고 한다. 두 달 전 나연(최나연)이의 올랜도 집에 며칠 묵었는데 단층이라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 너무 편했다. 단층집을 찾고 있다. 한국에서 받는 보너스 등은 아빠(박건규 씨)와 엄마가 관리하시는데 그동안 내가 번 돈은 1000원 한 장 쓰지 않으셨다.

당분간 내 곁에서 그랜드슬램이란 단어가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솔직히 남은 2개 메이저 대회 우승을 모두 놓친다고 해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목표를 120% 달성한 기분이다. 당초 올해의 선수상을 노렸다. 남은 메이저 대회 중 브리티시여자오픈은 골프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다. 에비앙 마스터스는 지난해 우승했던 대회라 타이틀 방어가 걸려 있다. 둘 다 의욕이 생긴다. 다시 달리자.

2013년 5월 2일

KB금융그룹과 메인스폰서 계약(4년에 20억 원 추정)을 했다. 3년 가까이 메인 스폰서가 없었지만 부모님(아버지는 페트병 필름 제조사 유레코, 어머니는 페트병 제조사 KIB 경영)의 도움 덕분에 값싼 호텔 찾아다니며 힘들게 투어 생활할 일은 없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잘나가는 동료를 볼 때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한동안 좋은 성적에도 스폰서가 없다 보니 외모지상주의 논란도 접했다. 동급이라면 예쁜 선수를 선호하는 세태를 이해한다. 기업들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압도적인 실력을 갖춰야 한다. 자신의 상품가치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2011년 8월 10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오빠와 약혼했다. 7세 연상의 오빠를 처음 만난 건 고교 3년 때인 200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골프연습장에서였다. 한국에서 전지훈련을 온 오빠의 첫인상은 그저 나이 많은 프로님이었다. 계속 마주치다 보니 사람이 너무 좋았고 이해심이 깊었다. 2007년 10월 경주에서 열린 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오빠에게 캐디 부탁을 했더니 바쁜데도 기꺼이 해줬다. 이를 계기로 더 가깝게 된 뒤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사귀었다. 2009년 내가 최악의 슬럼프(예선 탈락 7회)에 허덕일 때 오빠의 도움이 간절했다. 골프장 가는 게 도살장 끌려가는 것 같았다. 오빠랑 세계여행 다니듯 같이 투어를 다니고 싶었다. 한국 정서로는 말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떼를 썼다. 경기 안성 마에스트로CC 경기과장으로 3년째 번듯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오빠가 흔쾌히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성적이 좋았기에 ‘사랑의 힘’이라는 얘기가 나왔지 안 그랬으면 말이 많았을 것이다. 늘 곁에 오빠가 있어 행복하다.

약혼식 때 오빠는 2.5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줬는데 자기가 혼자 열심히 번 돈으로 장만한 것이라고 했다. 너무 고마웠다(박인비는 인터뷰에서 “우리 둘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은 지난해 에비앙 마스터스 우승 트로피”라며 “4년을 기다린 우승이었고 둘이 같이 투어를 다닌 이후의 첫 우승이라 감격스러웠다”고 밝혔다).

나는 육식을 좋아하고 오빠는 다양한 채소를 즐겨 먹는데 언제나 내 입맛에 맞춰준다. 준비할 게 많은 아침에는 오빠가 식탁을 책임지고 저녁상은 내가 차린다. 한국 음식을 먹어야 속이 개운하다. 결혼은 내년 12월에 할 계획인데 골프장 같은 곳에서 가까운 분들만 초대해 축복을 받고 싶다.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하고 싶다. 그때까지 2세 계획은 없다. 나와 오빠의 드림카는 모두 스포츠카다. 빨간색 페라리를 몰고 싶다.

2001년 5월 20일

엄마, 동생(프로골퍼 박인아)과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빠는 딸들을 위해 기꺼이 기러기 생활을 택해주셨다. 골프와 공부를 병행하려고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플로리다 주 마운트 도라라는 시골로 떠났다. 엄마는 중학교 1학년인 나의 영어 공부에 방해된다며 한국어 TV 프로그램, 인터넷, 게임을 멀리하게 했다. 힘들었다. 골프 선수라는 이유로 학교 영어 선생님이 1년 반 동안 매일 1시간씩 과외를 해 줬다. 2년 정도 지나니 귀가 트이고 입이 열렸다. 암기력이 좋은 편이라 단어 시험은 벼락공부를 해도 점수가 좋았다.

에필로그

요즘도 골프 연습을 좀 더하라는 충고를 자주 듣는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기에 운동은 방과후 3시간 정도밖에 하지 못했던 영향도 있다. 훈련 시간이나 공 몇 개를 쳤는가보다 퀄리티를 따진다. 감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냥 가방을 싼다. 선천적으로 손목이 약해 푸시업도 제대로 못한다. 무리하게 코킹(손목 꺾음)을 하다 다친 적도 있다. 그래서 코킹이 별로 없는 나만의 스윙을 갖게 됐다.

한국 후배들의 LPGA투어 도전이 많이 줄어들었다. 먼 길이고 고생스러운 건 맞다. 그래도 세계 최고 선수들과 겨루는 건 해볼 만한 일이다. 박세리 언니처럼 나도 어린 후배들에게 꿈의 무대를 열어주고 싶다.
▼ “특이한 스윙? 내 눈엔 예쁘기만 해” ▼

“인비는 어디서나 심플(단순함) 그 자체예요.”

박인비의 약혼자인 남기협 씨(32)는 미국 LPGA투어에서 발급한 코치 신분증을 달고 있었다. 한국프로골프(KPGA)투어 프로 출신인 그는 누구보다 박인비의 스윙을 속속들이 꿰고 있다. 세계 톱클래스 스윙 코치들의 지도를 받고도 실패를 겪은 박인비는 “오빠는 내 스윙만 봐도 그 대회 성적을 예측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박인비의 골프에 대한 질문에는 그저 “인비가 잘했을 뿐이다. 나는 내세울 게 없다”며 겸손해했다. 그는 “3년 가까이 인비 스윙을 지켜봤는데 투어 동행 이후에도 몇 달 동안은 스윙 얘기를 하지 않았다. 워낙 슬럼프에 빠져 있어 조심스러웠다. 다만 손목이 미리 릴리스되면서 방향성이 나빠지는 부분에 대해 조언했다”고 말했다. 임팩트할 때 체중이 왼쪽으로 전달되지 않고 손목을 많이 쓰다 보니 오차 범위가 넓었다는 뜻이다. “효율적으로 체중을 이동하고 손 컨트롤은 자제시키면서 몸과 팔이 같이 움직이는 느낌을 강조했죠.”

남 씨는 “선수 출신인 나도 인비의 퍼팅 감각은 부럽다. 퍼팅 라인 정렬을 너무 쉽게 한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그린에 올라 ‘타다닥 탁’ 하면 그냥 정렬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인비는 다른 프로 선수처럼 야디지북을 갖고 다니지 않고 그린 경사도 따로 그리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과 캐디의 조언을 따를 뿐이다. 그만큼 샷이 정확하고 고민이 적다”고 덧붙였다.

그는 “2년 넘게 같이 다니면서 싸운 적은 거의 없다. 본인이 힘들어도 투정 부리지 않는다. 밖에서는 골프 얘기도 거의 안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필드에 나서면 복잡한 생각을 피하고 한 가지에만 집중한다. 투어를 할 때 바지 10벌, 티셔츠 10장 정도를 갖고 다니는데 옷도 내가 골라주면 그냥 입고 나간다. 까다롭지 않고 털털하다”며 박인비를 치켜세웠다. 쉴 때는 한국 드라마를 내려받아 보고 ‘모두의 마블’이라는 스마트폰 게임을 즐기는 게 이들 커플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경주 불국사 근처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남 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골프에 입문했다. 2001년 프로에 데뷔했고 2008년 KPGA선수권 공동 8위가 최고 성적이다. 선수 시절 미국에 전지훈련을 갔다가 고교생 박인비를 만났다. 당시 박인비의 첫인상에 대해 “아기 같았다”고 말한 그는 “남들은 인비의 스윙을 특이하게 보는데 내 눈에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예쁘기만 하다”며 웃었다.

이헌재 기자·실베이니아=김종석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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