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의 긴 마이너생활 이기고 2006년 33홈런 123타점 2009년 37세 나이에 34홈런…약물복용 의혹 받기도 끝내주는 남자!…PS 9회 이후 홈런 3개 진기록 보유 올시즌 홈런 24개…“자기관리 잘 하면 쉰살까지 현역”
지난해 10월 11일(한국시간) 아메리칸리그(AL) 디비전 시리즈 3차전이 열린 양키스타디움. 뉴욕 양키스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1-2로 뒤진 채 9회말 공격에 돌입했다. 선두타자 스즈키 이치로의 잘 맞은 라인드라이브 타구는 볼티모어 좌익수 네이트 맥라우스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다음타자는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을 받는 알렉스 로드리게스. 순간 양키스타디움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날 삼진 2개를 당하는 등 디비전 시리즈에서 12타수 1안타로 부진한 로드리게스를 대신해 노장 라울 이바네스가 대타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짐 존슨을 상대로 초구 볼을 골라낸 이바네스는 2구째 몸쪽 공을 힘껏 잡아당겨 우중간 담장을 넘기는 극적인 동점 솔로홈런을 터뜨렸다. 조 지라디 양키스 감독의 승부수가 적중한 것이다. 연장 12회말 다시 이바네스의 타석이 돌아왔다. 선두타자로 나선 이바네스는 브라이언 마투스의 초구를 공략해 우측 담장 너머로 끝내기홈런을 날려 홈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바네스의 요술 방망이는 3일 후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AL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서도 폭발했다. 0-4로 뒤진 9회말 이치로가 디트로이트 마무리 호세 발베르데를 상대로 2점홈런을 빼앗아 추격의 불씨를 당겼다. 로빈슨 카노가 삼진을 당해 마지막 아웃카운트에 몰린 가운데 마크 테셰라가 볼넷을 얻어 출루했고, 이날 5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한 이바네스가 발베르데의 2구째를 동점 우월2점홈런으로 연결했다. 주장 데릭 지터가 수비 도중 발목 골절상을 입은 양키스는 결국 연장 12회 4-6으로 패했지만, 이바네스의 승부사 기질은 팬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40세의 노장임에도 포스트시즌 사상 처음으로 9회 이후 홈런을 3개나 때려낸 최초의 인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양키스에서 주로 대타나 우완투수 상대 선발 출장에 그쳤던 이바네스는 지난해 12월 친정팀 시애틀 매리너스와 1년 계약을 했다. 연봉은 275만달러지만 풀타임으로 뛸 수 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올 시즌 출발은 좋지 못했다. 4월 한 달 타율 0.158에 홈런을 2개밖에 치지 못했다. 41세의 한물 간 외야수에게 적절치 못한 투자를 했다는 비난의 소리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래도 메이저리그 18년차의 백전노장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5월 이후 타격감이 살아나더니 올스타전 브레이크 전까지 무려 24홈런을 터뜨려 AL 홈런 부문 공동 3위로 발돋움했다. 내셔널리그 홈런 1위 카를로스 곤살레스(콜로라도 로키스)와는 1개차에 불과했다.
이바네스가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시즌은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이던 2009년으로, 34개의 아치를 그렸다. 캔자스시티 로열스에서 활약한 2002년 137경기에서 기록한 것과 같은 개수의 홈런을 올 시즌 전반기에 76경기만 뛰고도 일찌감치 달성했다. 메이저리그에서 40대의 선수가 작성한 최다 홈런 기록은 1985년 디트로이트 대럴 에번스의 40개다. 당시 에번스는 40세였다. 전설적 타자 테드 윌리엄스는 41세에 29홈런을 때렸다. 현재의 페이스대로라면 이바네스는 자신의 최고 기록은 물론 에번스의 기록까지 넘볼 수 있다.
1972년 6월 뉴욕에서 태어난 이바네스의 부모는 쿠바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쿠바에서 화학자였지만, 미국으로 건너와서는 공장 근로자로 일해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선셋고등학교에서 포수를 맡았던 이바네스는 현재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사령탑인 프레디 곤살레스의 지도를 받는 행운을 잡았다. 당시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하다 오프시즌이면 이 학교에서 경비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곤살레스의 눈에 띄어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199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이바네스는 37라운드에서야 매리너스에 지명됐다. 마이너리그에서 배고픈 시절도 꽤 길었다. 처음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때는 1996년이지만,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 잡은 때는 2002년부터다. 6년이나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는 생활을 청산한 이바네스는 캔자스시티에서 타율 0.294, 24홈런, 103타점을 기록하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2004년 매리너스로 복귀한 이바네스는 팀의 간판타자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2006년에는 33홈런 123타점으로 거포 본능을 드러냈다.
2008년 12월 이바네스는 처음으로 다년계약을 체결하는 기쁨을 맛봤다. 3년간 3150만달러의 조건에 월드시리즈 우승팀 필라델피아로 이적한 것이다. 그러나 2009년 37세의 나이에 생애 최다인 34홈런을 터뜨리자 약물복용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바네스가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있는 비결은 철저한 자기관리다. 그는 “나이를 먹으니 운동도 더 효율적으로 하게 되더라. 또 음식관리에도 매우 신경을 쓰고 있다”며 “예를 들어 고기의 경우에도 사료 대신 풀만 먹고 자란 고기만을 섭취한다”고 노하우를 공개했다. 그의 아침 식단을 보면 오메가3가 들어있는 계란에 올리브나 코코넛 오일로 조리한 감자, 그리고 마늘과 케일이 전부다. 다이어트를 위해 절대 과식하지 않고, 가공식품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철칙이다.
“버나드 홉킨스는 48세의 나이에 라이트헤비급 세계타이틀을 방어했다. 철저한 자기관리만 따르면 쉰 살이 넘어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야구다”라고 주장하는 이바네스는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메이저리거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바네스는 짐 토미(은퇴)에 이어 가장 성품이 뛰어난 선수로 꼽히기도 했다.
7월말로 다가온 트레이드 마감에 이바네스는 포스트시즌 진출을 노리는 팀들의 ‘넘버원’ 타깃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바네스는 “아직 매리너스의 플레이오프 진출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반드시 매리너스가 플레이오프에 나설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아들 같은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묵묵히 경기에 임하는 이바네스에게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