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과이어·소사에 묻힌 AL 3년 연속 홈런왕 약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스타 재조명 통산 630홈런·10년 연속 골드글러브 기록 은퇴한 지 3년 만에 명예의 전당 헌액 영예
11일(한국시간) 세이프코필드에선 시애틀 매리너스와 밀워키 브루어스의 인터리그 경기가 펼쳐졌다. 승률 5할대를 밑돌아 사실상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희박해진 두 팀의 대결이었지만, 세이프코필드에는 4만6000여명의 관중이 만석을 이뤘다. 이날 경기 전 프랜차이즈 스타 켄 그리피 주니어(45)의 ‘매리너스 명예의 전당’ 입회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매리너스의 중계를 맡았던 데이브 니하우스와 선수 출신인 앨빈 데이비스, 에드가 마르티네스, 제이 뷰너, 랜디 존슨, 댄 윌슨에 이어 7번째로 구단 자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그리피 주니어는 “매리너스의 멤버라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애리조나대학에서 풋볼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큰 아들 트레이 그리피가 대형 전광판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빠를 둬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영상편지를 띄우자 팬들의 뜨거운 환호가 터지며 축제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리피 주니어가 은퇴한 때는 2010년 5월. 매리너스 구단은 왜 이처럼 서둘러 행사를 진행한 것일까(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은 은퇴 후 5년이 지나야만 심사를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첫 번째는 구단 역사상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로 군림한 그리피 주니어의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1994년 파업으로 인해 팬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메이저리그의 인기를 다시 끌어올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선수가 바로 그리피 주니어였다. 당시 미국프로농구(NBA)의 마이클 조던에 버금가는 폭발적 인기를 지녀 티켓 판매에 큰 영향을 미쳤던 그리피 주니어가 없었더라면, 매리너스가 킹돔을 떠나 초현대식 시설의 개폐식 돔 세이프코필드로 홈구장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는 타 구단과의 차별화를 노린 것으로 분석된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는 약물파동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2011년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 라이언 브론(브루어스)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다 뒤늦게 약물복용 사실을 시인하고 올 시즌 잔여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반면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을 받는 알렉스 로드리게스(뉴욕 양키스)는 팬들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감행하고 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내린 징계에 이의를 제기해 어떻게든 올 시즌을 마치려고 하고 있지만, 로드리게스를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은 냉담하기만 하다.
로저 매리스가 보유하고 있던 한 시즌 61홈런 기록이 깨진 1998년. 팬들의 관심은 마크 맥과이어(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새미 소사(전 시카고 컵스)의 홈런 레이스에만 쏠렸다. 그러나 2년 연속 56홈런을 치며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을 차지한 그리피 주니어는 그다지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맥과이어, 소사, 배리 본즈(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로드리게스 등과는 달리 그리피 주니어가 약물복용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선수라는 점을 팬들에게 다시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 매리너스 구단의 노림수라 볼 수 있다. 개인통산 630개의 홈런으로 메이저리그 역대 6위에 올라있는 그리피 주니어의 위대한 업적을 다시 조명함으로써 진정한 슈퍼스타의 기준을 재정립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1987년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번으로 매리너스에 지명된 그리피 주니어는 아버지 켄 그리피 시니어와 함께 51경기에 출전해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1990년 9월 1일 나란히 선발 출장한 그리피 부자는 1회 연달아 안타를 때린 뒤 모두 득점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2주 후, 역사적 기록이 수립됐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전에서 커크 맥캐스킬을 상대로 부자가 연속타자홈런을 때리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그리피 시니어도 현역 시절 대단한 선수였다. ‘빅 레드 머신’의 멤버로 1975년과 1976년 신시내티 레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모든 기록에서 그리피 주니어가 아버지보다 월등히 뛰어난 기록을 세웠지만 월드시리즈 우승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리피 주니어는 6세 때 아버지를 따라 신시내티로 이주했다. 클럽하우스는 어린 그리피 주니어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하루는 양키스의 클럽하우스에 갔다가 빌리 마틴 감독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양키스 구단주로부터 4번 해고당하고, 5번이나 양키스 사령탑으로 복귀한 다혈질의 마틴 감독은 클럽하우스에서 어슬렁거리고 다니는 어린 꼬마를 못마땅하게 여겨 호통을 치며 쫓아내버렸다.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그리피 주니어는 이 때부터 양키스를 가장 싫어하는 구단으로 여겼다고 한다. 현역 시절 양키스를 상대할 때마다 더욱 투지를 불태운 것도 이 때문이었다.
메이저리그의 스타플레이어를 아버지로 둔 것은 결코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부전자전’으로 남다른 운동 신경을 지닌 그리피 주니어는 고교 때 야구 외에도 풋볼에서 와이드리시버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남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높은 기대가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급기야는 고교 졸업반 때인 1988년 1월 아스피린 277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
그리피 주니어의 최전성기는 매리너스에서 활약한 1989년부터 1999년까지다. 이 기간 1752안타, 398홈런, 1152타점, 167도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을 4차례(1994·1997·1998·1999년)나 차지했고, 1997년에는 MVP로 뽑혔다. 공격뿐만 아니라 중견수로서 발군의 수비력을 뽐내 1990년부터 10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독식했다. 빠른 발을 이용한 폭넓은 수비에 몸을 아끼지 않는 다이빙 캐치, 그리고 높은 체공력을 이용해 상대의 홈런성 타구를 걷어내는 그의 진기명기에 팬들은 환호했다. 늘 활짝 웃는 친근한 이미지를 앞세워 시리얼을 만드는 위티스사와 스포츠용품 나이키사의 광고모델로도 큰 인기를 누렸고, 1999년 ‘스포팅 뉴스’에서 선정한 ‘가장 위대한 100인의 야구선수’에서 93위에 랭크됐다.
그러나 화려했던 매리너스 시절과는 달리 레즈로 이적한 2000년부터 그리피 주니어는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늘 그의 차지였던 올스타전 출전도 내셔널리그로 옮긴 뒤에는 2차례에 그쳤다. 골드글러브나 실버슬러거상과는 전혀 인연을 맺지 못했다. 빠듯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그리피 주니어에게 9년 1억1250만달러를 투자한 레즈 구단의 박탈감은 컸다. 결국 2008년 트레이드 마감일에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돼 그리피 주니어의 레즈 시대는 막을 내렸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레즈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겠다던 꿈이 신기루로 변해버린 것이다. 2009년 친정팀 매리너스로 원대 복귀했지만,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그리피 주니어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은퇴를 선언했다. 22년간의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은 타율 0.284, 630홈런, 1836타점.
그리피 주니어는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답게 처음과 끝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1989년 4월 4일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전 첫 타석에서 데이비드 스튜어트로부터 2루타를 뽑아내 빅리그 첫 안타를 기록한 데 이어 1주일 뒤 홈 개막전 첫 타석에서 데뷔 홈런을 때렸다. 그의 마지막 타석은 2010년 5월 21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전이었다. 2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진을 보이던 그리피 주니어는 상대 마무리 케빈 그렉으로부터 끝내기안타를 뽑아 자신의 2781번째인 생애 마지막 안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