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씨(31)는 16일 직장에서 하루종일 '야구삼매경'에 빠졌다. 아침 9시부터는 류현진이 속해있는 미국프로야구 LA 다저스가 세인트루이스와 펼치는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3차전을 봤다. 이후 잠시 업무를 하다가 오후 6시부터는 한국프로야구 LG와 두산의 플레이오프(PO) 경기에 빠졌다. 어차피 밥 먹듯 야근이라 '직관'(경기장에 가서 직접 관람하기)은 꿈같은 얘기다. 이 씨는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컴퓨터 화면 구석에 조그맣게 인터넷 생중계창을 띄워두고 곁눈질로 보지만 그나마도 야구광에겐 '깨알 같은' 행복이다.
10월의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야구 전성시대다. 원래 가을은 국내야구의 계절이었는데 류현진이 속한 LA 다저스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면서 야구 열기가 더 뜨거워지고 있다. 국내 프로야구는 8일 두산과 넥센의 준PO를 시작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자를 가리기 위한 혈투에 돌입했다. LA 다저스도 4일부터 월드시리즈 우승을 향한 포스트시즌을 치르는 중이다.
야구 경기가 보통 2~4시간씩 걸리다보니 두 경기만 봐도 어느덧 하루가 끝나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8일~14일 열린 두산과 넥센의 준PO는 경기마다 연장 접전을 펼쳐 매번 밤 10시를 넘겨서야 끝나곤 했다. 14일 열린 두 팀의 5차전 경기는 무려 4시간53분이나 걸려 역대 준PO 최장경기시간을 기록하기도 했다. 중간고사를 일주일 앞둔 두산 팬 한모 씨(28)는 "야구가 원망스럽고 야속하다"며 울상지었다.
직장인들은 평소라면 최대한 빨리 점심식사를 마치고 개인시간을 가지지만 류현진이 등판하는 날만큼은 다르다. 삼성물산 직원들은 15일 점심시간에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사옥 구내식당에 삼삼오오 모여 TV만을 바라봤다. 류현진이 세인트루이스를 상대로 7이닝 무실점하며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승리투수가 되자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유모 씨(28)는 "원래 식당 TV는 뉴스 채널로 고정돼 있었는데 류현진이 나오는 날이면 야구경기를 틀어준다. 구내식당이 함성으로 뒤덮힌 광경은 입사 이후 처음 봤다"며 웃었다. 이날 MBC 중계방송 시청률은 6.5%(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해 평소 같은시간대 시청률을 4~5배 웃돌았다.
3월부터는 운전 중 DMB를 보면 최대 7만원의 벌금을 물지만 운전자들은 야구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 못한다. 택시기사 김모 씨(55)는 "넥센과 두산의 준PO 5차전이 열린 14일에 앞에 있던 택시가 신호가 바뀐 뒤에도 한참 서 있길래 뭐하나 봤더니 DMB로 야구를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올 시즌 꼴찌를 해 '가을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한화 팬들은 지난해까지 팀의 간판 에이스였던 류현진의 맹활약을 보며 대리 위안을 삼는 웃지못할 광경도 펼쳐진다. 한화팬 김모 씨(29)는 넥센과 두산의 준PO 5차전이 열린 잠실야구장에 가서 한화의 유니폼 점퍼를 입고 괜스레 "류현진!"을 외쳤다.
전문가들은 국민들이 치열한 승부가 펼쳐지는 야구에 자신을 이입시켜 승리의 감정을 공유하며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하는 팀이 승리하면 자신감을 얻고 기분이 고양되는 호르몬 분비가 많아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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