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20시간의 긴 비행 끝에 도착한 콜롬비아 보고타의 거리는 술렁이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몸을 치장하고 북을 두드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보고타를 연고지로 성장한 프로축구 밀리오나리오스와 메데인을 연고로 하는 나시오날의 경기가 있던 날 저녁, 거리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엘캄핀’ 경기장에 입장하지 못한 팬들은 장외에서 기싸움을 벌이며 응원으로 팀 승리를 기원했다. 450g의 공은 콜롬비아 전체를 들어올렸다. 함성과 환희로 가득 찬 경기장 안과 밖의 열기는 방송을 통해서 그대로 전달됐다. 팬들은 선수와 한 몸이 돼 경기장 안팎을 장악한다. 경기 종료 후 승리한 팀 응원단의 축제와 패한 팀 응원단의 침묵이 거리를 채운다. 축구공 하나가 영웅을 탄생시키기도 하고 불운의 주인공을 만들기도 했다.
콜롬비아 축구 하면 많은 사람은 자책골로 살해당한 선수의 죽음을 떠올린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은 월드컵 사상 최악의 펠레의 저주로 기억될 만한 대회였다. 펠레는 남미예선 최종전에서 아르헨티나를 5-0으로 무너뜨린 콜롬비아를 월드컵 우승후보로 지목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본선경기에서 어이없는 자책골로 패했고 그 대가로 자책골을 넣은 선수는 귀국 후 살해됐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지 않은가. 한때 콜롬비아의 축구는 남미의 최고로 통했다. 근대 축구의 시조로 불리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알프레도 데 스테파노와 아돌포 페데르네라 같은 스타들이 콜롬비아 프로축구팀에 입단했다. 1950년대 초반 축구의 새로운 역사는 콜롬비아에서 만들어졌다. 1990년대에는 프란시스코 마투라나 감독 아래 세계적인 선수들이 배출됐다. 세기에 기억될 남미 축구선수로 선정된 전설적인 미드필더 발데라마, 1990년대 최고의 공격수로서 콜롬비아 축구사에서 가장 우수한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아스프리야, 그리고 축구 역사상 가장 화제가 되는 장면 중 하나인 ‘스콜피언킥’(엎드리며 발뒤꿈치로 하는 킥)을 연출했던 골키퍼 이기타…. 이런 선수들의 등장으로 콜롬비아는 1990, 1994년 그리고 1998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뛰어난 개인기에 이은 현란한 골을 보여주며 세계 축구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식민노예제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콜롬비아 사회의 인종질서 속에서 흑인은 백인에게 복종해야 했고 편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축구장에서만큼은 흑인이 박수갈채를 받는 영웅으로 부상한다. 축구는 깨지지 않는 인종과 계층 간의 단단한 벽조차 순식간에 허물어 버린다. 축구는 삶을 지배하는 종교와도 같다. 흑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승리 염원 의식은 주술에 가깝다. 승리도 패배도 모두 신의 뜻이다.
콜롬비아는 지역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메데인과 칼리의 경쟁관계는 축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양 지역은 콜롬비아의 최대 마약 카르텔이 운영되던 곳이다. 메데인을 발판으로 성장한 나시오날은 세계 10대 부자로 알려졌던 마약왕 에스코바르의 자금으로 유지됐다. 1970년대 국제 마약시장의 핵심 인물로 등장한 에스코바르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빈민층을 위한 다양한 지원 사업을 했다. 그중에서도 역점사업은 축구장 건립이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축구는 고단한 오늘을 잊고 내일을 향해 달릴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축구는 삶의 출구이며 미래로 인도하는 열쇠이기도 했다.
에스코바르가 암살, 납치 및 폭파 혐의로 투옥됐을 당시 프로축구 선수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투옥 중에도 그는 개인 운동장을 만들어 축구경기를 즐겼다. 에스코바르와 경쟁관계를 유지했던 칼리 카르텔의 로드리게스 형제도 프로축구팀에 막대한 자금을 제공했다. 칼리의 아메리카는 로드리게스 패밀리의 자금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축구와 마약자금의 불가분의 관계가 형성됐다. 나시오날과 아메리카를 통해 세계적인 선수들이 배출됐고 동시에 양 팀은 콜롬비아 축구를 지탱하는 양대 산맥으로 발전했다.
콜롬비아는 16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선다. 콜롬비아는 우승 예상을 했을 땐 부진한 결과로 실망을, 패배를 예상했을 땐 기대 밖의 성과로 놀라움을 선사했다. 올여름 브라질에서, 접었던 날개를 활짝 펴고 비상해 ‘추락하는 것은 더 멀리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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