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전체 타율보다 득점권 타율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프로야구 팬도 적지 않다. 주자가 2루 이상에 있을 때 타율을 나타내는 이 기록이 높을수록 팀 공헌도가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득점권 타율이 높으면 정말 팀 공헌도, 그러니까 타점이 많아지는 걸까.
26일 동아일보에서 한국야구위원회(KBO) 공식 기록을 토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 중 득점권 타율이 가장 높은 선수는 LG 이병규(9번)였다. 이병규는 득점권 타율 0.426으로 74타점을 올렸다. 그런데 이병규보다 타점이 하나 적은 KIA 이범호는 득점권 타율이 0.196밖에 안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병규는 득점권에서 132번 타석에 들어섰고, 이범호는 이보다 45번 많은 177번 타석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범호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베이스에 나가 있던 주자는 388명으로 이병규(298명)보다 90명 많았다. 득점권 타율이 중요해도 ‘기회’보다 중요하지는 않은 것이다. 타순별로 알아보면 4번 타자 앞에 주자(3754명)도 가장 많고, 타점(782점)도 가장 많았다. 1번 타자는 주자(2868명)도 가장 적고, 타점(412점)도 가장 적었다.
1번 타자와 4번 타자를 가르는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장타력’이다. 보통 장타력이 가장 뛰어난 선수가 4번 타자를 맡는다. 1번은 장타력보다는 높은 출루율이 더 중요한 자리다. 당연히 장타력도 타점 수를 결정한다. 짧은 단타로는 2루 주자가 홈에 생환(生還)하지 못할 수 있지만 홈런은 100% 득점으로 이어지는 까닭이다.
두산 홍성흔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 베이스에 있던 주자를 모두 합치면 416명으로 리그에서 가장 많았다. 반면 타점은 72점에 그쳤다. 득점권에서 장타력이 0.366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넥센 박병호는 홍성흔보다 주자는 12명 적었지만 득점권에서 장타력 0.633을 기록하며 홍성흔보다 45점 많은 117타점을 올렸다. 타점 2위(98타점) 삼성 최형우가 득점권에서 장타력(0.493)이 낮고도 타점이 많았던 건 전체 홈런 29개 중 19개(65.5%)가 솔로 홈런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타점은 기회와 장타력의 합작품이다. 시즌 개막을 앞두면 “올해 목표는 80타점”처럼 말하는 선수가 적지 않다. 이 목표를 이루려면 장타력을 갖춘 4번 타자가 되는 건 물론 동료들에게 “제발 내 앞에서 살아나가 달라”고 로비(?)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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