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얘기하자면 길어지는데…”라면서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 때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가 이끌던 팀은 당시 우승을 목표로 출전했지만 4강전에서 패했다. 3위 결정전으로 밀린 그의 팀은 동메달을 놓고 이란과 맞붙었다. 하지만 금메달이라는 동기가 사라진 탓인지 선수들은 의욕이 없어 보였다. 그런 중에도 ‘미친놈’처럼 혼자서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 선수가 바로 당시 프랑스의 AS모나코 소속이었던 박주영(29·왓퍼드)이었다.
그는 전반전을 0-2로 뒤진 채 마친 휴식 시간에 라커룸을 뒤집어 놓았다. ‘나이 많은 형이 유럽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죽어라 뛰고 있는데 도대체 너희들은 뭐냐’며 선수들의 넋을 빼놓았다. 박주영은 당시 23세 이하가 출전할 수 있었던 아시아경기에 와일드카드로 뽑혀 참가했다.
손흥민 1골-1도움 박주영의 결승골을 도운 손흥민(왼쪽)이 후반 9분 승리에 쐐기를 박는 추가 골을 터뜨린 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함께 활약하는 구자철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아테네=AP 뉴시스
그는 “지도자가 된 뒤로 지금까지 그때처럼 화를 많이 냈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선수(박주영)한테 감독이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그가 지휘봉을 잡았던 아시아경기 축구대표팀은 후반 들어 4골을 넣고 4-3으로 역전승해 동메달을 땄다. 2-3을 만드는 추격 골을 넣었던 박주영은 경기가 끝난 뒤 펑펑 울었다. 홍 감독의 박주영에 대한 끝없는 신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다. 당시 후배들을 이끌고 팀을 위해 헌신하는 박주영의 모습도 ‘원 팀’(하나의 팀)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홍 감독의 마음을 끌었다.
홍 감독은 이런 박주영이 팬들이나 언론에 ‘자기밖에 모르는 선수’로 비치는 걸 안타까워한다. 믿음을 주면 보답이 돌아왔다. 이 또한 홍 감독이 그동안 박주영 카드를 쉽게 버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좀처럼 카메라 앞에 서기를 꺼리는 박주영은 자신의 병역 연기를 두고 논란이 커지자 2012년 6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때 박주영의 옆자리를 지킨 사람이 홍 감독이다.
병역 연기 논란에 대해 박주영이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기자회견이었지만 먼저 말문을 연 건 홍 감독이었다.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이지만 선배로서 용기를 주려고 나왔다. 박주영 선수가 군대를 안 가면 내가 대신 가겠다는 얘기를 하러 이 자리에 나왔다.” 이 기자회견으로 박주영의 병역 연기 논란은 한풀 누그러졌고, 당시 런던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던 홍 감독은 곧바로 박주영을 와일드카드로 뽑아 런던으로 데려갔다. 박주영은 런던 올림픽 3위 결정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어 한국 축구에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안겼다.
이번에도 그랬다. 홍 감독은 욕먹을 작정을 하고 그동안 얘기했던 것과 달리 박주영을 그리스와의 평가전 엔트리에 넣었다. 당연히 원칙을 어겼다느니, 소신을 접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았다. 홍 감독은 “소속 팀에서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선수를 선발하기는 힘들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는 원칙과 다른 결정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면서 “그리스전이 박주영 선수를 점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박주영은 지난해 2월 크로아티아전 이후 13개월 만의 A매치인 6일 그리스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면서 경기 감각 논란을 한 방에 잠재웠다.
애초부터 홍 감독에게 박주영은 벤치 신세를 면치 못해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선수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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