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제2 복싱 중흥’ 꿈꾸는 왕년의 챔피언 염동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2일 03시 00분


“여자도 권투 1년정도 배우면 남자 쓰러뜨릴 수 있어”

염동균 한국권투인협회 회장이 올1월 개관한 인천 남구 주안동 ‘권투체육관’에서 과거 세계를 제패할 때의 예리한 눈초리로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여자복싱 활성화에 발 벗고 나선 염 회장은 “복싱이 사람 몸에 가장 좋다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전신운동이고 중심을 잡고 전후좌우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장 기관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결과도 있다. 국민 전체가 건강을 위해 복싱을 즐기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염동균 한국권투인협회 회장이 올1월 개관한 인천 남구 주안동 ‘권투체육관’에서 과거 세계를 제패할 때의 예리한 눈초리로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여자복싱 활성화에 발 벗고 나선 염 회장은 “복싱이 사람 몸에 가장 좋다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전신운동이고 중심을 잡고 전후좌우로 움직이기 때문에 내장 기관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결과도 있다. 국민 전체가 건강을 위해 복싱을 즐기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976년 8월 1일 부산에서 열린 리고베르토 리아스코와의 세계권투평의회(WBC) 슈퍼 밴텀급(55.34kg 이하) 타이틀매치. ‘빗속의 혈투’로 불린 그날 경기에서 심판 판정으로 이겼는데 열흘 뒤 판정 번복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하지만 한국 복싱사에 큰 획을 그은 ‘작은 거인’은 그해 11월 2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리아스코를 꺾고 챔피언이 된 일본의 로열 고바야시를 무너뜨리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1970년대 한국 복싱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홍수환과 유제두가 무참히 무너지며 복싱 열기가 식을 무렵 다시 불을 지핀 168cm의 단신 복서 염동균 얘기다.

“그땐 참 황당했지. 우리 국민 모두가 억울해했어. 다시 도전장을 내고 챔피언에 올랐을 땐 국민 모두가 환호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국민 전체가 붉은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열광했듯 그땐 온 국민이 복싱에서 즐거움을 찾을 때였지. 그 시절이 그리워.”

‘한국 타이틀 14차 방어, 동양 타이틀 5차 방어, 세계 챔피언 1차 방어, 통산 전적 66전 54승(21KO) 5패 7무….’

한국 복싱 역사에 전설을 쓴 염동균 한국권투인협회 회장(64)은 요즘 복싱 열기를 되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23일 오후 2시 전남 해남우슬체육관 특설링에서 열리는 챔피언 우지혜(27)와 도전자 제니퍼 한(30)의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페더급(57kg 이하) 타이틀매치(채널A 생중계)도 염 회장이 프로모션한 것이다.

염 회장은 1979년 은퇴한 뒤 프로모터로 유명우(WBA, OPBF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와 백인철(OPBF 슈퍼웰터급 챔피언), 박종팔(IBF,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등을 발굴해 권투 흥행의 마술사로 통했다. 사각의 링에 스폰서 광고를 처음 도입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남자 권투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여자 복싱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우리나라는 여자들이 더 강해. 훈련도 열심히 하고 직업의식도 강하지. 남자하고 차원이 달라. 요즘 남자들 정말 정신 차려야 해. 얼마 전 끝난 소치 겨울올림픽을 봐. 남자는 금메달 하나도 못 땄지만 여자는 3개나 따지 않았나. 바야흐로 여성의 시대가 됐어.”

1998년부터 여자 선수들의 경기를 프로모션하기 시작했다. 첫 선수가 한국계 미국인 킴 메서(48). 메서는 2000년 8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특설링에서 다카노 유미(일본)를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으로 꺾고 IFBA 주니어 플라이급(48.98kg 이하) 챔피언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1966년생인 메서는 다섯 살 때인 1971년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스토리로 친부모를 찾고 있어 국민들의 관심을 끈 선수였다.

우지혜-제니퍼 한 세계타이틀매치 포스터.
우지혜-제니퍼 한 세계타이틀매치 포스터.
2006년 IFBA 스트로급(52kg 이하) 세계 챔피언이 된 박지현(29·인천시청)도 염 회장 작품. 박지현은 지난해 10월 주지스 나가오와(필리핀)를 꺾고 세계 타이틀을 14차까지 방어한 한국 여자 복싱의 간판이다. ‘해남 타이틀매치’의 주인공 우지혜도 염 회장이 키웠다. 우지혜는 IFBA 슈퍼페더급(58.97kg 이하)과 페더급(57.15kg 이하)을 모두 석권했다. 슈퍼페더급을 5차까지 방어한 뒤 페더급 타이틀을 획득해 이번에 2차 방어전을 벌이는 것이다.

염 회장은 “남자나 여자나 자질 있는 선수는 있는데 스폰서를 잡지 못해 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번 우지혜 타이틀 방어전을 위해 몇 달간 백방으로 뛰어다녀 간신히 대회를 치를 비용을 마련했다. 해남군이 도와줘 타이틀매치를 할 수 있게 됐다.

“해남군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야. 대회를 자주 치러야 선수들이 돈을 벌 수 있고, 그래야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지. 그런데 경기 자체가 씨가 말라 선수들이 복싱판을 떠나는 실정이야. 과거엔 방송사들이 권투라면 모두 중계했는데 요즘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이번에 채널A가 아니었으면 중계도 없는 경기를 할 뻔했어.”

염 회장은 복싱이 다시 인기를 얻는 데는 TV 중계가 필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중계를 위해선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인기 종목’으로 전락한 권투를 어떤 방송도 중계하지 않으려 해서 안타깝단다.

염 회장은 복싱이 비인기 종목이 됐지만 요즘 다시 부활의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 전국의 권투체육관에 남녀 회원들이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염 회장은 “이시영 효과가 컸다. 탤런트로 얼굴도 예쁜 여자가 권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도장을 찾는 여자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시영은 생활체육으로 복싱을 시작해 엘리트 선수로 변신한 케이스. 그는 4년 전 불방된 방송사 단막극에서 권투선수 배역을 맡은 걸 계기로 복싱을 시작했다. 이시영을 키워주기 위한 편파 판정이라는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지난해 초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염 회장은 “한국권투인협회에서 3개월에 한 번씩 생활체육 권투대회를 열고 있는데 이시영도 그 대회를 통해 성장했다”고 말했다. 한국권투인협회는 2007년 창립돼 생활체육 권투인 육성에 힘을 쏟고 있으며 염 회장은 2010년부터 이 단체를 이끌고 있다.

염 회장은 ‘이시영 효과’를 이용해 엘리트 선수를 키우기 위해 올 1월 인천 남구 주안동에 주니어라이트급(58.9kg 이하) 한국 챔피언 출신인 제자 안진아 씨(52)와 함께 권투체육관을 열었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되는데 벌써 여성이 20여 명이나 등록했다. 이 중 10명은 엘리트 선수를 지망하고 있다.

경기 파주의 타이거짐복싱도 ‘이시영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원래 여성 비율이 10%를 넘기 힘들었는데 30%까지 늘었단다. 방학 때는 여성 비율이 40%까지 오른다. 정해직 타이거짐복싱 관장(48)은 “어머니들이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운동시키는 경우가 많다”며 “주부들도 찾아와서 복싱에 열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6년 11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염동균(왼쪽)과 로열 고바야시(일본)의 세계권투평의회(WBC)슈퍼밴텀급 타이틀매치. 동아일보DB
1976년 11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염동균(왼쪽)과 로열 고바야시(일본)의 세계권투평의회(WBC)슈퍼밴텀급 타이틀매치. 동아일보DB
타이거짐복싱에서도 엘리트 선수가 탄생했다. 김준철 씨(31)는 2년 전 생활체육으로 복싱을 시작했고 지난해부터 엘리트대회에 출전해 1승 1패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우지혜 세계타이틀매치의 오픈 게임인 64kg급 경기에도 출전한다. 김 씨는 “복싱이 재밌다. 도전정신도 키워준다. 상대와 주먹으로 경쟁하기 때문에 전략과 전술도 필요하다. 상대를 눕혔을 때의 쾌감도 끝내준다”고 말했다. 김 씨와 비슷하게 생활체육으로 시작해 엘리트 선수로 크고 있는 여자 유망주가 타이거짐복싱에도 있다.

한국권투인협회가 주최하는 전국생활체육복싱대회 및 체급별 타이틀매치에는 전국에서 500여 명이 참가한다. 초등·중등·고등부, 20대부, 30대부, 40대부, 50대부, 여성부로 나뉘어 열리는데 여성 참가자가 100명에 이른다. 다음 대회는 5월 24일과 25일 서울 중구 구민회관에서 열린다.

“이 대회에 현직 검사와 의사,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 속칭 잘나가는 사람들도 많이 나와. 여기서 희망을 찾을 수 있지. 복싱 하면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염 회장은 ‘복싱은 전혀 위험한 스포츠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글러브를 끼고 머리와 복부를 가격하기 때문에 사망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단다. 그는 “과거 김득구 선수가 경기하다 죽고 가끔 사망사고가 나서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는데 복싱에서 죽는 선수와 다른 종목 사망 수치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사고는 어떤 스포츠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염 회장은 “솔직히 이런 식의 접근을 싫어하지만 복싱은 다이어트 효과가 최고”라며 “여자도 1년 정도 하면 일반 남자를 쓰러뜨릴 수 있는 기량을 갖추게 되고 호신술에도 큰 도움이 되니 여성들에게 안성맞춤인 스포츠”라고 말했다. 염 회장은 또 “복싱은 싸움을 가르치는 스포츠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스포츠”라며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하며 훈련 중 극한의 고통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생활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염 회장의 최종 목표는 남자 복싱 활성화. 그는 “지금은 여자 복싱 발전에 집중하고 있지만 남자 복싱이 다시 옛날의 인기를 찾아야 복싱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높아진다”며 “비행 청소년들을 인도하는 차원에서 소년원 등에서 유망주를 발굴하는 작업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염 회장은 “이왕 인터뷰하는 김에 내가 왼팔 하나로 세계를 정복한 사실도 써 달라”고 주문했다. 전형적인 인파이터였던 염 회장은 선수생활 후반 아웃복서로 바뀌었다. 이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일화를 소개했다.

“1975년 일본 다나카 후타로와의 동양 챔피언 5차 방어 때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부러졌어. 수술로 뼈와 인대를 다시 이어 붙였지만 부자연스러웠고 통증도 느껴 내 특기인 오른팔 훅을 날릴 수 없었지. 그래서 왼팔로만 상대를 가격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빠른 발로 치고 빠지기 작전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어. 세계 챔피언에 오를 때도 그랬지. 왼팔 하나로 세계를 정복한 거야.”

염 회장은 신체적 어려움을 겪은 뒤 세계 챔피언에 도전했다. 경기에서 이기고도 심판의 판정 번복 논란을 겪었지만 굴하지 않았고 결국 세계 정상에 섰다. “주먹 하나로 세계도 제패했는데…. 한국 복싱의 화려한 과거를 꼭 되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 염 회장은 약 40년 전 세계를 제패하기 위해 휘둘렀던 주먹을 이젠 복싱 활성화를 위해 휘두르겠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염동균#복싱#한국 복싱#여자 복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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