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류현진(27·LA 다저스)만 한 효자가 또 있을까요. 동산고를 졸업하고 프로에 데뷔한 류현진은 7년간 98승을 거뒀습니다. 지난해 다저스로 떠나면서는 2573만 달러(약 273억 원)의 이적료를 한화에 남겼지요.
SK와 롯데에 류현진은 가슴 아픈 이름입니다. 신인 지명에서 우선 지명권을 갖고 있던 SK와 2차 드래프트 첫 순서였던 롯데는 다른 선수를 뽑았습니다. 한화는 류현진을 2차 두 번째로 데려갔습니다.
당시 왜 류현진을 뽑지 않았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미래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일이니까요. 다만 여러 가지 상황이 맞아떨어진 게 류현진의 성공 이유였습니다. 한화 사령탑이던 김인식 한국야구위원회(KBO) 기술위원장은 고졸 신인 류현진에게 선발의 중책을 맡겼습니다. 가능성도 높게 봤지만 투수가 부족한 팀 내 사정도 있었습니다. 구대성은 스프링캠프에서 류현진에게 체인지업을 전수했지요. 류현진은 프로 데뷔 첫 경기부터 7과 3분의 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기회를 잡았습니다.
3월 30일 LG와 두산의 잠실경기에서 8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LG의 고졸 신인 임지섭(19)이 데뷔 무대에서 5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된 것입니다.
임지섭은 LG의 1차 지명 신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2년 전까지는 마산 용마고를 다녔습니다. 3학년이던 지난해 제주고로 전학을 갔던 그가 LG 유니폼을 입은 배경에는 복합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지난해 4월 KBO 이사회는 1차 지명을 위해 구단별로 5개씩의 고교를 배정했습니다. 기존 구단의 연고권에 속하지 않은 제주와 강원, 전북 지역 고교는 추첨을 통해 고교 팀이 5개가 안 되는 구단에 추가 배정했지요. 제주고는 추첨에서 서울 연고로 포함됐습니다.
그럼 왜 하필 LG였을까요. 지난해 5월만 해도 LG는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약팀이었습니다. 그래서 두산과 넥센은 LG에 우선권을 주기로 했지요. 그 대신 올해는 넥센, 내년에는 두산이 가장 먼저 선수를 뽑는 걸로 합의했습니다.
‘강속구를 던지는 왼손 투수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오라’는 스카우트계의 격언이 있습니다. 지난해 7월 1일 열린 1차 지명 때 LG의 선택은 당연히 임지섭이었지요. 5월 황금사자기에서는 최고 시속 148km를 던지더니 LG 지명을 받은 뒤 출전한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는 152km까지 던졌지요.
하지만 그때까지도 임지섭은 유망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영입을 추천했던 정성주 스카우트는 “3년을 두고 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를 통해 기량이 급성장했습니다. 그러고는 3월 30일 만원 관중 앞에서 대형 사고를 쳤습니다.
김기태 감독은 하루 뒤인 31일 그를 2군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1∼3일 SK와의 3연전에 류제국-우규민-리오단이 등판한 뒤 주말에 4일 휴식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8∼10일 사직 롯데 3연전에 위의 3명의 투수를 다시 한 번 등판시킨 뒤엔 임지섭을 1군으로 불러올려 또 선발 기회를 줄 계획입니다. 김 감독은 “한국 최고의 왼손 타자라는 김현수(두산)와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임지섭이 커준다는 것은 LG가 더 강해진다는 의미”라며 그를 중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불과 한 경기를 잘했다고 해서 그가 류현진처럼 대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볼수록 류현진과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같은 왼손 투수에 덩치도 비슷하고, 어린애 같은 순진한 표정도 닮았습니다. 입단 계약금마저 2억5000만 원으로 같습니다.
무엇보다 류현진이 그랬듯 임지섭은 데뷔전에서 두려움 없이 자신의 공을 던졌습니다. 때와 흐름을 잘 탄다면 임지섭도 LG의 효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인생은 타이밍, 야구도 역시 타이밍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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