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레지기, 31년만에 美에 우승컵 안겨 “참사 슬픔을 이긴 보스턴은 강하다” 소감 테러로 다리 잃은 피해자들도 다시 달려 “굴하지 않는다는 것 보여주기 위해 왔다” 참가자 9000명 늘고 관람객도 2배 껑충
멥 케플레지기(39·미국)는 결승선을 앞두고 무서운 뒷심을 발휘했다. 그의 막판 스퍼트는 테러에 굴하지 않는 인간의 강한 의지를 상징하는 듯했다. 그리고 1년 전 폭탄테러로 얼룩졌던 바로 그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다. 2시간8분37초. 제118회 보스턴마라톤 남자부 우승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미국 국적의 선수가 보스턴마라톤에서 시상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은 1983년 그레그 메이어 이후 무려 31년 만에 처음이었다. 케냐의 윌슨 체벳은 케플레지기보다 11초 늦은 기록으로 남자부 2위에 올랐다. 여자부에선 리타 젭투(케냐)가 2시간18분57초로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정상에 섰다.
● 보스턴마라톤, 1년 전 테러에도 굴하지 않고 대성황
지난해 열린 제117회 보스턴마라톤은 결승선 부근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로 얼룩졌다. 3명이 숨지고, 260여명이 부상을 당한 참사였다. 그러나 제118회 보스턴마라톤은 1년 전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참가자와 관람객은 증가했다. 주최측은 참가자가 지난해보다 9000명 이상 늘어난 3만6000여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관람객은 지난해보다 무려 2배 가까이 증가한 100만명으로 추산했다.
참가자 가운데는 지난해 대회에서 테러로 부상을 당한 뒤 올해 다시 레이스를 펼친 이들도 있었다. 외신에 따르면, 참가자들은 “보스턴마라톤이 테러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왔다”며 불굴의 의지를 표현했다. 이날 보스턴마라톤의 코스에선 매사추세츠주 경찰, 미연방수사국(FBI) 등에서 파견된 3500명 이상의 인원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관람객들은 곳곳에 설치된 금속탐지기와 보안견의 검색을 거쳤다. 참가자 중에는 60여명의 한국인도 있었다. 이들은 세월호 침몰 사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한 뒤 레이스를 펼쳤다.
● 남자부 우승자 케플레지기 “보스턴은 강하다!”
남자부 우승자 케플레지기는 1975년 아프리카 에리트레아에서 태어난 뒤 12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전쟁과 징병의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써내려갔다. 비록 살림은 어려웠지만, 운동과 학업에서 모두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미국의 명문대 UCLA를 3.95학점으로 졸업할 정도로 우등생이었고, 2004아테네올림픽에선 은메달을 목에 걸며 미국마라톤의 에이스로 떠올랐다. 2009년 뉴욕마라톤에선 정상에 서기도 했다.
케플레지기는 지난해 보스턴마라톤에는 부상으로 불참했지만, 관람객으로서 결승선 근처에 자리를 잡고 응원을 펼쳤다. 자칫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폭탄테러가 발생하기 5분 전 자리를 떠 화를 면했다. 이번 대회에서 그는 유니폼 등번호에 폭탄테러 희생자의 이름을 적고 레이스를 펼쳤다. 케플레지기는 우승 직후 “‘보스턴은 강하다.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겠다’고 다짐했다. 보스턴은 미국 역사와 마라톤의 심장이다. 그 일원으로서 영광스럽다. 지난해 참사는 슬픈 일이었지만, 미국인과 보스턴시민들은 역경을 극복하고 하나가 됐다”며 뜨거운 수상 소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