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그레(현 한화) 장종훈은 1992년 시즌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때렸습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처음으로 41번째 홈런이 터진 순간이었죠. 그러나 이 타석 전까지 0.298이었던 타율은 홈런을 치고도 0.299에서 멈췄습니다. 만약 그에게 한 타석이 더 있었다면 장종훈은 ‘3할 타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메이저리그 연구 결과를 보면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가 정답입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전문대학원(MBA) 와튼스쿨 데빈 포프, 유리 시몬손 팀이 1975∼2008년 메이저리그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타율 0.299로 마지막 타석에 들어선 타자들은 그 마지막 타석에서 타율 0.430을 기록합니다. 타율이 정확하게 0.300인 타자까지 합치면 0.463으로 더 좋아집니다.
국내 프로야구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두산 홍성은은 지난해 타율 0.299로 정규시즌을 마쳤는데요. 준플레이오프 첫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냈습니다. 이 타석을 정규 시즌에 포함시킨다면 정확하게 타율 0.300(470타수 141안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안타 하나에 희비가 엇갈린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삼성 내야수 김근석은 타율 0.299를 기록한 1984년에 안타 하나만 더 쳤어도 커리어에 한 번은 3할 타자가 될 수 있었을 거고, 팀 후배 양준혁은 타율 0.300으로 시즌을 마친 1994년에 안타 하나가 모자랐다면 데뷔 이후 10년 연속 3할 타자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시즌 타율 0.300을 기록한 선수는 더이상 경기에 나서지 않는 걸 적잖게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위에서 말씀드린 와튼스쿨 연구 결과를 보면 메이저리그에서 시즌 타율이 0.298이나 0.299인 상태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교체되는 타자는 4.1%밖에 되지 않지만, 시즌 타율이 정확하게 0.300이면 34.3%가 경기에서 빠집니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이런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모든 걸 다 보여주지 않아도 거의 다 보여주는 비키니 수영복처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프로 원년(1982년)부터 지난해까지 시즌 타율 0.290∼0.310을 기록한 타자 140명 중에서 0.300이 35명으로 가장 많고, 0.301이 22명으로 그 다음으로 많은 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사실 타율 0.299와 0.300은 그리 대단한 차이가 나지 않는 기록입니다. 타율 0.280과 0.300도 그렇습니다. 400타수를 기준으로 하면 0.300은 안타 120개, 0.280은 안타 112개로 8개 차이입니다. 6개월 동안 프로야구가 열린다고 했을 때 3주에 안타를 하나 더 치냐 못 치냐 하는 걸로 0.280 타자와 0.300 타자가 갈리는 셈입니다.
하지만 0.299는 2할이고, 0.300은 3할입니다. 누구도 초라한 ‘2할 타자’가 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몸값마저 달라집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따르면 연봉 변동이 없는 자유계약선수(FA)를 제외하고 봤을 때 타율 0.300을 기록한 선수는 이듬해 연봉이 38.9% 오르지만, 0.299인 경우에는 연봉 상승률이 22.8%에 그칩니다. 홈런 41개를 쳐 2930만 원에서 7800만 원으로 연봉이 2.7배 오른 장종훈을 포함해도 그렇습니다. 만약 오심으로 안타가 아웃으로 바뀌거나 그 반대 상황이 나온다면 심판이 본의 아니게 선수 몸값까지 좌우하게 되는 셈입니다.
심판의 의무를 정의한 야구 규칙 9장은 ‘심판원에 대한 일반지시’로 끝이 납니다. 여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라! 최고의 필요조건은 정확한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주저 없이 동료와 상의하라. 심판원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확한 것’이다.”
이 일반지시를 처음 쓴 메이저리그처럼 이제 우리도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비디오 화면을 돌려보라”고 말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10분간 경기를 묶어두는 한이 있더라도 규칙서를 참조하면서 매듭을 푸는 것이 좋다”는 문장도 심판원에 대한 일반지시에 들어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확실히 그런 게 아닐까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