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적응? 모스크바 날씨 모르나”, “한국선수 이름까지 알 필요 없다”
기자 질문 마음에 안들면 면박 줘… 러 주장 “우리 팀 최고스타는 감독”
듣던 대로였다. 일흔을 바라보는 노장(老將)의 말투에 완곡함은 없었다. 이리저리 에둘러대지도 않았다.
파비오 카펠로 러시아 축구대표팀 감독(68·이탈리아)이 한국과의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을 하루 앞둔 17일(한국 시간) 쿠이아바의 판타나우 경기장 미디어센터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을 하는 기자를 향해 날 선 대답으로 면박을 주면서 ‘독재자’ ‘돈 파비오’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줬다. ‘돈(Don)’은 이탈리아의 마피아 두목을 가리키는 말이다. 카펠로 감독은 이탈리아 출신이다
러시아의 한 기자는 쿠이아바의 날씨 얘기를 꺼냈다가 카펠로 감독에게 무안을 당했다. 이 기자는 “(경기가 열리는) 쿠이아바는 덥고 습한 곳이라 선수들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데 경기 하루 전에야 여기에 왔다.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라고 물었다. 돌아온 카펠로 감독의 대답은 ‘(기자는) 혹시 브라질에서 살고 있나?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지 않느냐’라는 것. 그는 “모스크바도 충분히 더운 곳이다. 우리가 훈련할 당시 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갔다. 적응에 문제 될 건 없다”고 했다. 카펠로 감독은 모스크바도 여름에는 덥다는 걸 충분히 알 만한 기자가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러시아의 다른 한 기자는 “조별리그 첫 상대인 한국의 전력 분석에 소홀한 것 아니냐”라는 질문을 던졌다가 머쓱해졌다. 이 기자는 “훈련장에서 만난 한국 선수들은 러시아 선수들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더라. 그런데 러시아 선수들은 한국 선수 이름을 거의 모른다. 비정상 아닌가”라고 했다. 카펠로 감독의 대답은 짧고 심드렁했다. “충분히 준비했다. 이름까지 알 필요 없다.” 한국 선수들을 다소 무시하는 듯한 카펠로 감독의 이런 발언을 전해 들은 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의 이름을 외우는 게 어려운 건 사실이다. 이해해줘야 한다”는 유머로 가볍게 받아넘겼다.
카펠로 감독은 평소 선수들의 숨소리까지 관리한다는 우스갯말이 있을 만큼 선수들을 장악하는 강한 카리스마가 트레이드마크인 지도자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선수들의 사생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을 금지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도 있었다. 그의 대답은 역시 까칠했다. “(월드컵이 끝나는) 한 달 후에 집에 가서 미친 듯이 하면 된다.”
카펠로 감독은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가끔 유머감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진기자들이 한꺼번에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갈 때는 “카메라를 잊지 말고 잘 챙기라”는 농담을 던졌다. 평소 친분이 있는 러시아 기자들과 눈이 마주칠 때는 가볍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기도 했다.
이날 카펠로 감독과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러시아 대표팀의 주장 바실리 베레주츠키는 “우리 팀의 최고 스타는 감독이다. 선수 중에는 감독만큼 유명한 스타가 없다”며 카펠로 감독의 존재감을 인정했다. 카펠로 감독은 브라질 월드컵에 출전한 32개국 중 나이와 연봉(114억 원)이 제일 많은 사령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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