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식을 마치고 인터뷰실로 들어온 박찬호(41)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여전히 침착하고 단단한 눈빛으로 연신 “영광이다”, “감사하다”고 했다. 현역에서 뛰고 있는 후배들이 직접 추진하고, 한국 프로야구를 총괄하는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정성들여 준비한 ‘코리안 특급’의 은퇴식. 마침내 팬들에게 진짜 마지막 인사를 건넨 박찬호는 “앞으로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더 커졌다”고 털어 놓았다. 다음은 박찬호와의 일문일답이다.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을 치른 소감은?
“솔직한 감정으로는 정말 슬프다. 진짜로 떠나는 기분이 든다. 2012년 마지막 경기에 등판하면서 나 혼자서는 ‘이게 마지막일 수 있다’고 상상을 했었는데, 그게 현실이 됐다. 그 뒤로 지난 20개월 동안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올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해왔다. 오늘 이 자리는 공 하나만 던질 수 있는 기회였지만, 계속해서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정말 영광스럽고 내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이 자리가 후배 선수들이 나를 위해 처음 만들어준 자리라는 게 더 큰 영광이다. 그동안 후배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후배들이 내게 더 큰 책임감을 갖게 해준 것 같다. 야구계에 이런 의(義)과 애(愛)가 공존하고 있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시포자로 NC 김경문 감독을 선택했다.
“내가 부탁드렸다. 감독님은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내게 꿈을 주신 분이다. 베어스의 포수로서, 공주 출신으로서. 우리 초등학교 야구장에 오셔서 캐치볼을 하신 모습이 기억이 난다. 애틀랜타에서 감독님이 지도자 연수를 받으실 때 미국에서 뵈었는데, 상당히 먼 선배님인데도 힘들어하는 내게 용기를 주셨던 시간도 있었다. 프로야구 감독으로서 명성을 쌓으실 때마다 늘 존경스러웠다. 시간 될 때마다 감독님 팀을 방문해서 조언도 받았다. 존경하는 분이고 훌륭한 선배님이다. 그래서 마지막 공을 받아 달라고 부탁 드렸다. 감독님께서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고 나 역시 더 큰 존경심이 느껴졌다.”
-2012년 11월 은퇴 기자회견 이후 어떻게 지냈나.
“은퇴 발표 후 처음에는 훈련을 멈출 수가 없었다. 뭔가 내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다. 오래 전 텍사스 시절 심리치료를 받을 때 박사님이 해주신 얘기가 있다. ‘네가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나중에 은퇴를 하고 나면 공을 던질 기회가 없어서 더 힘들 거다’라고. 그땐 그게 이해가 안 됐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내일 다시 홈런을 맞고 게임이 망가질지언정 공을 다시 던질 수 있는 희망이란 게 있었으면 좋겠더라. 그게 뭔가 불안했고, 계속 훈련도 했고, 한화가 어려움을 겪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공을 던져보곤 했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를 치유하는 게 가장 힘들더라. 많은 선수 분들, 특히 경력이 화려한 분들이 은퇴 이후에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도 그 길을 그대로 가게 된 것 같다.
다행히 골프를 시작하고 다른 운동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되니 나아졌다. 또 지난 한 해 동안 전시회, 책 출간, 야구교실, 야구대회 등 여러 일을 하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간을 나 스스로 보냈다. 올해는 미국에 가서 아이들 키우고, 가사를 돕는 데 매진했다. 또 앞으로 내가 한국 야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한국 프로야구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한국 야구 발전에 대한 책임감이 커 보인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많은 분들이 많은 일을 내게 맡기고 싶어 하신다. 그럴 때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좀 더 공부를 하게 됐다. 한국 야구는 계속 발전을 해왔다. 꾸준하게 발전해나가기 위해서는 좀 더 다양성을 갖춰야 할 것 같다. 모두가 한국 야구를 주목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선수들과도 많이 교류하고 있다. 야구를 통해 선수들이 어떤 것을 느끼고 전달할 수 있는지, 그 메시지에 대해 의미 있게 생각하고 있다.”
-감독이나 코치로서의 현장 복귀는 어떤가.
“매력적인 부분인 것 같다. 사실 친정팀 한화를 보면 안타까운 부분들이 있다. 마음 같이 안 풀리는 점들이 많지 않나. 야구가 그런 것 같다. 보통으로 공부하고 준비를 해서는 정말 안 될 것 같다. 감독이란 꿈을 갖고 있다면 더 많은 공부와 성찰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아무리 매력적이라도 아직은 내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따로 더 준비할 생각이다.”
-LA 다저스 류현진의 요즘 활약을 보면 어떤 느낌을 받나.
“아주 큰 보람을 느낀다.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해주고 있다. 내가 미국에서 뛰면서 한국 야구의 문을 열었다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게 나에게는 큰 책임감이자 부담감이었다. 항상 안주하는 게 불안하고 지켜보는 눈도 많았다. 지금 류현진은 한국 야구의 질을 높이는 일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류현진으로 인해) 한국 야구의 수준을 인정하고 있고, 아시아 야구의 리더 역할을 하면서 사회의 한 부분을 지켜가고 있다. 더 큰 선수가 됐다. 선배로서 고맙고 영광스럽다. 선배의 영예가 더 빛나려면 후배들의 성공과 활약이 뒤따르는 게 중요하다. 한국에서 뛰는 다른 선수들도 자신 이외에 더 많은 후배들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따로 조언할 부분은 없나.
“그냥 ‘지금 같이만 하라’고 하고 싶다.(웃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게임이 끝난 뒤에 나와야 하는데 내가 처음부터 너무 주인공 역할을 한 것 같아서 어색해졌다. 그래도 내게는 소중한 날인 것 같다. 처음 친구 홍원기 코치에게 ‘후배들이 네 은퇴식을 추진하고 있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무척 멋쩍었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굉장히 영광스러웠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자리지만, 각 팀의 올스타들 앞에서 오랫동안 상상만으로 꿈꿔왔던 순간을 맞이한 것 같다.
미국에 간 지 3년 정도 됐을 때 루 게릭 선수의 은퇴식을 봤는데, 그때부터 언젠가 내가 한국 리그에 가서 한국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거였다. 또 국가대표로 활동하면서 그 마음이 더 커졌다. 그 꿈같은 일이 실현된 것이다. 이 기회를 주신 분들, 그리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야구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