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밤바다 하늘은 유난히 별이 잘 보인다. 안구 정화를 위해선 이만한 도시가 없다고들 한다. 종영한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인천은 요즘 별을 보려는 한류 물결로 술렁인다. 한 달 뒤에는 더 많은 별이 인천으로 밀려든다. 인천 아시아경기를 수놓을 아시아 최고의 스포츠 스타들이 집결하기 때문이다. 가장 빛나는 별이 되기 위해 스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본보는 인천을 빛낼 스타를 조명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 한국의 아시아경기 도전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기록을 노리고 있는 ‘마린보이’ 박태환(25·인천시청)이 첫 주인공이다. 》
지난달 5일 박태환은 호주 골드코스트 해변가에서 세 살 된 조카 (김)태희의 손을 꼭 잡았다. 박태환에게는 남자들의 로망인 ‘탤런트 김태희’와는 비교 불가능한 최고의 ‘김태희’다.
“삼촌이 꼭 금메달 따줄게.”
박태환은 조카와 손가락을 걸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사진 3장을 찍었다.
이달 전지훈련차 호주를 다시 찾은 박태환은 요즘 이 사진을 매일 꺼내 본다.
“아시아경기가 끝나고 나면 고마운 사람들이 생각날 것 같아요. 조카 태희와 태은이에게 고맙다고 꼭 말할 겁니다.”
박태환은 인천에서 금메달을 따면 세리머니 꽃다발을 조카들에게 줄 생각이다.
박태환에게 8월은 상념에 잠기게 하는 달이다. 강렬한 ‘악몽’ 하나와 수영 인생 최고의 짜릿한 ‘감격’ 하나가 8월의 기억을 지배한다.
2004년 8월 14일은 아테네 올림픽 수영 남자 자유형 400m 예선에서 출발 총성이 울리기 전 물에 뛰어드는 바람에 실격된 충격의 날이었다. 하지만 4년 후 2008년 8월 10일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베이징 올림픽 수영 남자 자유형 400m 결선에서 한국 수영 올림픽 사상 첫 메달을 황금빛으로 장식하게 해 준 날이었다.
악몽과 감격 사이, 한참 사춘기였던 박태환을 일으켜 세운 건 아시아경기였다. 박태환은 2006년 카타르 도하 아시아경기 수영 남자 자유형 200m, 400m, 1500m를 휩쓸었다. 스스로 “아테네의 악몽이 걷혔다”고 말할 만큼 수영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마린보이’라는 별명이 박태환의 전유물이 된 것도 이때다.
“수영 인생에서 모든 대회가 중요하지만 아시아경기는 특별하게 저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인천 아시아경기는 더욱 애착이 크다. 박태환은 “무엇보다 한국에서, 또 제가 소속된 팀이 있는 인천에서 열리잖아요. 또 제 이름이 걸린 수영장에서 경기가 열리는 만큼 꼭 좋은 성적을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고 말했다.
인천 아시아경기 수영 종목은 인천 남구 문학동에 위치한 ‘문학 박태환 수영장’에서 열린다. 자신의 이름이 걸린 경기장에서 아시아경기 금메달을 따는 건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짝수 해에 제가 항상 잘했잖아요. 이 분위기를 이어나가면…(웃음).”
느낌은 좋다. ‘2006, 2008, 2010, 2012년….’ 박태환은 아시아경기와 올림픽을 번갈아 가며 좋은 성적을 냈다.
그렇다고 징조를 맹신할 박태환이 아니다. 박태환은 지난달 대표 선발전 자유형 200m에서 1분45초25로 올 시즌 세계랭킹 1위 기록을 세웠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에서 세운 자신의 최고기록(1분44초80)에 불과 0.45초 뒤진 좋은 기록이다. 다음 달 박태환과 금메달을 다툴 라이벌로는 중국의 쑨양과 일본의 샛별 하기노 고스케가 꼽힌다. 두 선수에 대한 질문에 박태환은 즉답을 피했다. 괜한 자존심 대결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이유에서다.
지난달 30일 호주로 전지훈련을 떠난 박태환은 오전 5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착실하게 소화하고 있다. 박태환은 “시즌 1위 기록을 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만 신경 쓰겠다”고 말했다.
인천 아시아경기를 앞두고 수영 관계자들이 박태환을 보는 눈은 달라졌다. 긍정적인 평가가 이구동성으로 들린다. 현재 박태환은 스폰서 없이 예정된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불만은 없고, 스타 의식도 사라졌다. 훈련 뒤에 듣는 아이돌 그룹의 신나는 최신 노래를 낙으로 삼아 훈련에만 집중할 뿐이다. 운동선수의 굴곡진 여정을 이제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도 한 방법이듯, 현재의 상황에 감사하고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아마도 이 점을 주변에서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신념의 변화가 가져다준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그래서 예전과는 다르게 즐길 수 있는 수영을 하게 됐어요. 노련미도 생겨 저만의 페이스로 경기를 운영할 수 있는 자신감도 생겼고요.”
박태환은 한국 선수로 아시아경기 통산 최다 금메달 획득에 도전한다. 2006년과 2010년 대회에서 연속 3관왕에 오른 박태환은 양궁의 양창훈, 승마의 서정균과 함께 한국 선수 최다 아시아경기 금메달 획득 기록을 갖고 있다. 양창훈과 서정균은 이미 현역에서 은퇴했다. 따라서 인천 아시아경기에서 박태환이 금메달을 1개만 보태면 새로운 기록의 주인공이 된다. 박태환은 “최다 금메달 타이틀은 영광스럽다. 하지만 그보다는 정말 최선을 다해 얻는 결과가 금메달이기 때문에 더 감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 ‘마린보이’도 이제 20대 중반이다.
“이제 나이가 ‘보이(boy)’는 아니잖아요. 하하. 그런데 언제 들어도 기분 좋아요. 국민들이 만들어주신, 나를 대표할 수 있는 별명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은 별명이 있을까 싶어요.”
인천 아시아경기가 박태환을 위한 대회일 수 있다는 징조가 또 있다. 9월 21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인천 아시아경기 수영 종목 다음 날인 9월 27일은 박태환의 25번째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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