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한다. 마침내 당신은 ‘쇼’에 입성하게 됐다. 이제 모든 사람이 당신을 미워할 거다.”
스포츠 작가 잭 햄플은 ‘똑똑하게 야구 보기(Watching baseball smarter)’라는 책에서 메이저리그 승격 통보를 받은 심판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올 시즌 전반기에는 심판이 판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욕을 얻어먹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한국형 비디오 판독 시스템인 ‘심판 합의판정 제도’ 도입을 서두른 이유일 겁니다. 시즌 중에 갑자기 이런 제도를 도입하는 건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래도 22일로 어느덧 제도 도입 한 달이 됐고, 이제 단단히 뿌리를 내려가는 느낌입니다. 이럴 때 KBO에 박수 한 번 쳐주시죠.
지난달 24일 첫 사례가 나온 뒤로 지금까지 합의판정은 모두 38번 나왔습니다. 그중 20번(52.6%)은 원래 심판 판정이 맞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메이저리그도 21일 경기까지 심판 판정이 맞았던 게 52.7%니까 우리 심판들 자질이 큰 문제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합의판정 요청을 받은 심판의 면면을 보면 재미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군대 용어인 ‘짬밥’이 큰 영향을 끼치는 겁니다. 판정이 뒤바뀐 18번 중 4번(22.2%)이 김준희 심판 몫입니다. 김 심판은 1군 심판 출장이 아직 44경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퓨처스리그(2군)에서 8년 동안 739경기 진행을 맡았지만 올해 처음 경험한 ‘쇼(1군)’에서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있는 겁니다. 반면 모두 합쳐 9953경기 경험이 있는 1군 팀장 5명은 총 5번의 합의판정 신청을 받아 1번만 판정을 바꿨습니다. 1군 팀장 중 김풍기 심판은 아예 합의판정 요청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심판 합의판정을 시작하면서 감독들도 ‘판정대’에 올랐습니다(표 참조). 두산 송일수 감독은 9번이나 합의판정을 요청했지만 딱 1번(11.1%) 판정을 뒤집는 데 그쳤습니다. 반면 삼성 류중일 감독은 ‘원 샷 원 킬’. 롯데 김시진 감독도 3차례 신청해 모두 판정 번복을 이끌어 냈습니다. 횟수로만 따지면 넥센 염경엽 감독이 4번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상대방이 우리 팀 경기에서 판정 번복을 이끌어낸 것과 비교해 보면 삼성과 LG가 가장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1번 판정을 바로잡는 동안 상대 팀은 4번이나 판정을 뒤집었으니 말입니다. 반면 한화를 상대로 판정 번복에 성공한 팀은 없습니다. 그 사이 한화는 3번 성공했습니다.
제도가 자리 잡으면서 언제부턴가 “30초 제한 시간이 부족하다”는 소리도 쏙 들어갔습니다. 사실 이 제한 시간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KBO에 권유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먼저 해보니 시간제한을 두지 않았던 걸 후회해 ‘너희는 미리 시행하라’고 조언했다고 하네요. 메이저리그는 이닝이나 경기 마지막 아웃 카운트 때 10초 제한만 있습니다.
합의판정은 다소 서둘러 시작했지만 포도를 최대 6주만 숙성하는 ‘보졸레 누보’ 와인처럼 야구팬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있지만 시간이 보완해 줄 거라고 믿습니다. 경험이 좋은 심판을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보졸레 누보도 좋지만 역시 오래 묵은 와인이 깊은 맛을 내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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