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결정적 순간에 빛나고 싶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떨지 않고 제 실력을 발휘하는 선수는 드물다.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어렵다. 그런 점에서 진종오(34·kt)에겐 ‘권총 황제’란 표현도 부족하다. 사격 관계자들은 “이제 사격에 관해선 신의 경지에 오른 것 같다”고 평가한다. 올림픽(금3·은2), 세계선수권(금2·은1·동2) 등 큰 무대에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9일(한국시간) 스페인 그라나다 후안 카를로스 1세 올림픽사격장에서 열린 제51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 남자 50m 권총 본선 경기는 진종오 인생 최고의 경기 중 하나였다. 60발 합계 583점을 쏘며 1980모스크바올림픽에서 알렉산드르 멜레니에프(소련)가 세운 종전 세계기록(581점)을 넘어섰다. 이 기록은 국제사격연맹(ISSF)의 부문별 세계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마의 벽으로 꼽혀왔다. 진종오는 2012런던올림픽 10m·50m 권총 2관왕 달성에 이어 10·50m 권총 세계기록에 모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 “만약 신이었으면 단체전에서도 잘 쐈겠죠”
34년 만에 세계기록을 수립한 직후였다. 진종오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상기돼 있었다. 그러나 “사격의 신”이란 말에는 손사래를 쳤다. “감사하긴 한데 말도 안 되죠. 제가 만약에 신이었으면, 어제(8일) 단체전에서도 잘 쐈겠죠?” 그는 전날 50m 권총 단체전에선 556점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대표팀은 중국에 밀려 은메달을 획득했다.
‘권총 황제’는 진공의 상태에서 총을 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계기록을 세운 경기에서도 별별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초반엔 ‘아…, 어제는 왜 이렇게 안 맞았지?’, 중반엔 ‘이제 사람들이 내 뒤로 몰려드는구나’, 후반엔 ‘지금쯤 감독님께서 진짜 기대하고 계시겠는 걸?’, 이랬다니까요. 무념무상의 상태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 있으면 안 되죠. 소림사에 들어가야죠.(웃음)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 60발이 아니라 지금의 한발로 승부해야
그렇다면 비결은 뭘까. 사격대표팀 김선일(58) 코치는 “총을 정지시키는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벌벌 떤다면, 총구도 흔들리게 된다. 사격에선 결국 멘탈이 기술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진종오는 순간적 집중력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만큼은 철저히 몰입하는 것이 핵심이다. 진종오는 “사격은 60발이 아니라, 한발 한발로 승부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떠난 탄환에 미련을 둘 필요도 없고, 아직 쏘지도 않은 탄환에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의미다. 메이저리그 출신 박찬호(41)가 “100개의 공을 던질 때 공 한 개씩을 끊어서 생각하라”고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김성근 감독(72·고양 원더스)의 좌우명 일구이무(一球二無·공 하나에 두 번째란 없다)와도 궤를 같이 한다. 결국 ‘신의 경지’란 바로 지금, 이 한순간에 자신의 절박함을 모두 거는 것이다.
● “아시안게임? 부담 백배”
11일 10m 공기권총 개인·단체전을 끝으로 세계선수권 일정을 마감하는 진종오는 14일 귀국해 인천아시안게임 체제로 돌입한다. 아시안게임에선 개인전 정상에 오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목표의식은 확실하다. 그러나 세계기록의 여운은 마음의 짐이기도 하다. “이제 큰일 났어요. 부담 백배죠. 세계선수권에서 이렇게 성과를 냈는데, 아시안게임에서 못하면 어떡하나요.(웃음)”
진종오가 이번 대회 50m 권총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한국은 2016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출전 쿼터를 따냈다. 이 쿼터는 개인이 아닌 국가에 부여된다. 일본처럼 쿼터를 딴 선수에게 바로 올림픽 출전권을 주는 국가도 있지만, 한국의 경우 또 한번 치열한 국내 선발전을 거쳐야 한다. 진종오는 “마지막 올림픽이 될 수도 있는데, 안타깝긴 하다”며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에선 그의 올림픽 출전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다. 진종오가 현존하는 최고의 권총선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서부개척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 것 같나”라는 한 팬의 질문에 그는 “그 때도 권총으로 한 자리 꿰차지 않았을까요”라며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라나다(스페인)|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트위터@setupma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