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시아경기]새 역사 쓰는 북한 力士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4일 03시 00분


세계신 2개 등 사흘 연속 금메달
“달걀에 사상을 채우면 바위도 깨”
김정은 독려에 역도 대대적 투자
장미란 은퇴뒤 노메달 南과 대조

한 외신기자가 전해준 안타깝고도 부끄러운 이야기 한 토막. 인천 아시아경기대회를 취재 중인 북한 취재진이 역도경기가 열리고 있는 인천 달빛축제정원 역도경기장의 이곳저곳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기자는 “아마 남북한 역도경기장을 비교해 체제선전용으로 쓰려는 게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이번 대회를 위해 임시로 지은 역도경기장은 열악한 시설로 선수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심하게 말하면 경기장을 둘러싼 대형 천막 하나에 보조 건물로 쓰는 컨테이너 몇 개를 갖다 놓은 수준이다. 화장실도 간이화장실이고, 변변한 식당도 없다.

그런데 올해 3월 평양 청춘거리 체육촌에 있는 ‘력기경기장’(역도경기장의 북한식 이름)은 최신 시설로 리모델링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역도를 앞으로 승산 종목의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고 지시한 뒤 대대적으로 시설 확충을 했다고 한다.

원래 강했던 북한 역도는 북한 지도층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번 아시아경기에서 세계 정상급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

엄윤철은 20일 역도 남자 56kg급에서 용상 세계신기록(170kg)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다음 날인 21일 남자 62kg급의 김은국은 인상(154kg)과 합계(332kg) 세계신기록을 작성했다. 22일에는 역도 여자 58kg급에 출전한 이정화가 합계 236kg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같은 날 남자 69kg급의 김명혁이 은메달을 땄다. 23일에는 여자 63kg급의 조복향이 동메달, 남자 77kg급의 김광성이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북한 역도는 벌써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수확했다.

23일 인천 아시아경기 메인프레스센터(MPC)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엄윤철과 김은국은 세계신기록의 비결에 대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 동지 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엄윤철은 기자들을 향해 “이 자리에 달걀로 바위를 깰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은 뒤 “김정은 동지께서 ‘달걀을 사상으로 채우면 바위도 깰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 덕에 인공기를 펄럭이고 (북한) 애국가를 울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은국 역시 “오래전부터 허리 부상으로 고생했지만 김정은 동지의 사랑과 배려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제대회에서 입상한 북한 선수들이 ‘경애하는 최고사령관’을 입에 올리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북한 역도선수들의 말이 공치사인 것만은 아니다. 북한 역도의 급상승세에는 김정은의 관심과 북한 당국의 대대적인 투자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2년 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엄윤철과 김은국은 ‘인민체육인’을 넘어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최고 단계인 ‘공화국영웅’ 바로 아래 단계다. 승용차와 아파트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은 지난해 8월 평양에서 열린 역도 세계 클럽선수권대회를 직접 참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역도는 큰 인기를 얻고 있고, 역도선수가 되려는 어린이도 많다. 이름 없던 신예 선수가 매년 새롭게 나타나 좋은 성적을 올리는 것도 두꺼운 선수층이 바탕이 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장미란(현 장미란재단 이사장)이 은퇴한 뒤 한국 역도는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런던 올림픽에서 노메달에 그쳤던 한국 역도는 이번 아시아경기에서 한 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하고 있다.

인천=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인천 아시아경기대회#북한#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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